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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바래다 주고 오는 길은

by 어린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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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다주고 오는 길은


광활한 바다를 관망하는 것처럼


위대하지만 지루합니다




마을 버스를 타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늘 같고


비슷한 사람들은 폰에 고개 숙입니다




터벅터벅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면


창밖으론 이따금 보이는 밝은 빛의 광장


흰색 이어폰으로 귀를 닫는 또 비슷한 사람들




푸른 바다를 보기가 싫었습니다


힘들지는 않아도


단지 지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도착하면


초록불이 되는 오늘의 신호등


때마침 오는 오늘의 버스


신나는 쇳소리를 내는 오늘의 지하철


소소한 우연이 발걸음을 간질거리네요




바래다주고 오는 길은


나풀거리는 잡념을 잠자리채로 잡으며


태도를 가다듬는 소중한 길입니다



반복이라는 모래밭 속에서


의미라는 바늘을 찾는 것은


그대가 아닌 제게 달려 있음을 압니다









바래다 주고 오는 일만큼 낭만적인 일이 있을까요. 둘이 갔다 하나로 오는 길은 잘 몰랐던 둘이 하나가 되는 일만큼 소중한 일입니다. 같은 창밖의 풍경,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지루하다고 생각하면 꽤 지루한 광경입니다. 오늘만큼은 그 태도를 바꿔봅니다. 미약하게 그려봤던 시상을 머릿속으로 전개해보고,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은 곱씹어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니 바래다주고 오는 길이 적적하지 하진 않았습니다. 제게 벌어진 일이 아니라 벌어진 일을 마주하는 제 태도가 제 삶에 더 큰 영향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헌신의 가치가 소멸해가는 현대 사회입니다. 친구와 연인 관계에서 계산의 논리가 지배적인 위치에 올랐고, 희생이 호구로 오명되고 있습니다. 잘못되었던 것들이 합리적으로 바뀌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헌신의 미학이 얼룩지는 것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저도 부지불식간에 합리성의 구렁텅이로 빠지곤 합니다. 기어 올라오기가 참 어렵습니다. 조건을 달지 않으면 행동할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제 삶이 제가 아닌 조건에 결정되는 불행입니다.



조건없이 행동해보려 합니다. 무조건 해봅니다. 그냥 가고, 그냥 해보고, 그냥 저질러 봅니다. '무조건'이라는 단어에서 따스함이 묻어 나옴을 알게 됐습니다. 사랑은 무조건이라는 장작 위에서 꾸준히 데워지는 것 같습니다.



따스한 글은 따스한 맘에서 나옵니다. 따스한 말도 따스한 맘에서 나옵니다. 따스한 행동도 따스한 맘에서 나옵니다. 겉만 신경쓰느라 정작 중요한 속을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 글로 반성해봅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따스함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이 시를 쓸 때 들은 노래입니다. 좋은 노래이니 공유해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qxYufr2J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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