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원하는 교대원생]
[EP10. 교대(Trade)를 원하는 여정으로서의 교육대학원]
직업 교대를 원한다.
몇 가지의 무모한 생각이 들었다. 그 무모한 생각은 결국 교육대학원 입학과 졸업으로 인해 시작됐고, 얼추 가능해지기도 했다.
#1. 첫 번째 무모한 생각 : 배우(페르소나)에 대한 동경
‘persona’라는 영어 단어는 ‘가면’이라는 뜻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 배우들이 사용하던 가면으로부터 어원이 되어 사용되는 단어라고 한다. 배우는 참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을 가끔 했었다. 물론 힘들고 어렵고, 그만한 재능과 노력이 없다면 쉽게 될 수 없는 직업이기도 하다. 내가 동경하게 된 배우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만약 인간 ‘홍길동’이라는 배우가 있다면, 그는 ‘홍길동’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 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작품에서 이 배우가 맡게 된 역할의 이름과 직업, 성격과 대사 등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드라마나 영화 등 작품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역할이지만, 그 작품을 본 사람들은 일상에서도 그 사람의 연기로 인해 때론 그를 그 작품의 역할로 인식하기도 한다. 배우는 그런 측면에서, 여러 정체성을 가져보고, 체험해볼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돼 매력적이었다. 원래 직업은 배우일 뿐이지만, 때론 의사가 될 수도 있고, 때론 변호사가 되기도 한다. 그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직접 의사나 변호사의 행동양식을 관찰하고 체험해보기도 한다. 나는 배우는 될 수 없지만,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장교, 누군가에게는 기자, 누군가에게는 선생으로 불리고 싶었다. 그런 무모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교육대학원 입학부터였던 것 같다.
#2. 두 번째 무모한 생각 : 십잡스요?
나는 무한도전 마니아다. 이 프로그램이 종영된지는 벌써 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튜브 등 플랫폼을 통해 재생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없없무’(없는 것이 없는 무한도전), ‘무한계시록’ 등의 ‘밈’도 생길 정도로 종영 이후에도 여러 세대에 걸쳐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이례적인 프로그램이다. 나 또한 이 프로그램에게 참 감사하다. 때론 나의 식사 메이트가 되어주기도 하고, 때론 나의 자장가가 되어주기도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는 무한도전을 몇 번이고 돌려본다. 그것이 없었다면, 때론 더 울적해지고 깊은 고뇌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도 많았을 것 같다. 이 무한도전은 레전드 짤을 많이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중 ‘십잡스’라는 방송인 방명수에게 붙여진 별명이 나의 무모한 생각과 도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레전드로 회자되는 ‘무한상사’ 편에서 상황극을 하던 중 유재석이 방명수에게 무한도전 내에서 여러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이야기하며 ‘세븐잡스(seven jobs’를 언급했고 거기에 매일 세 끼를 꼬박 식사하니까 ‘십잡스’(10jobs)라며 일종의 무리수 섞인 발언을 했다. 약간의 무리수 덕분인지 민망한 나머지 웃음이 세어나온 유재석의 표정과 오랜만에 보는 유재석의 무리수에 “십잡스요?”라고 말하며 찰지게 받아낸 하하의 대사가 적절히 어우러져 웃음을 주는 장면은 이제 내가 실제로 찾아보지 않아도 그 상황과 장면이 머릿속에 환하다. 무리수 섞인 상황극 속 농담이었지만, 내가 그 십잡스가 되고 싶었다. 직업으로 ‘7jobs’를 달성하고, 유재석의 말마따나 세 끼를 챙겨 먹어 ‘십잡스’라는 별명을 얻고 싶었다. 사실 나이게 몇 개인데 그런 생각을 했는지 철 없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나에게는 도파민이 터지는 ‘무한도전’의 시작이었다.
#3. 세 번째 무모한 생각 : 우리 사회에 대한 반항심
난 우리 국가와 사회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속한 이 공동체가 잘 되길 바라고 안전하길 바라고, 무엇보다 살기 좋길 바란다. 그래서 사람들이 갈등하고 경쟁하기보다 평안한 상태에서 협동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또, 나는 자라오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길러오기보다 순응하고 희생하는 정신의 고귀함에 대해서 배워왔던 것 같다. 여러 사회화 과정을 통해 나는 그런 사회인으로 성장해왔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 정치학을 공부하게 되고, 여러 책들에 관심을 가지고, 언론보도와 그것을 활용한 활발한 토론 가운데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함께 함양하게 됐다.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과 그것을 위한 헌신의 고귀함과 동시에, 잘못되고 변화해야하는 부분에 대한 합리적 비판도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우리 사회에 대한 여러 비판의식은 내 안에 있지만, 대학교 3~4학년쯤을 지나던 나에게 지배적으로 찾아온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었다.
‘왜 우리 사회는 스무 살 중반이 채 되기 전에 하나의 직업을 선택해야할 것만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는가?’였다.
대학교 1~2학년은 아무 생각 없이 자유를 만끽하며 놀았다. 그러다가, 대학교 3학년이 되고 여자 동기들은 일반 휴학을 하며 진로를 탐색하기도 하고, 남자 동기들은 대부분 군대에 갔다. ROTC 생활을 하던 나는 그간 같이 다니던 동기들의 부재 속에서 때론 혼자서 캠퍼스를 거니는 일이 많았다. 그 시절 나는 사회로 나설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사회적 활동에서 밀려오는 심한 취업에 대한 압박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던 시기였다. 휴학으로 잠시 학생의 신분을 유지하며 다른 무언가를 탐색해볼 시간도 없었고, 그렇다고 군 전역 이후에 뚜렷하게 무엇이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두려움 속에 시간을 보내다보니, 결국 위와 같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생겼다. 나는 그런 사회의 무의식적 압박 속에 반항하고 싶었다.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고, 하고 싶은 것을 찾지도 못했는데 그저 사회적 분위기에 견디지 못해 남들에게 꿀리지 않을만한 어떤 한 직업을 선택해서 매진하는 일에 내 소중한 젊음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행히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할 수 있고, 해보고 싶던 직업의 리스트를 나만의 기준 안에서 작성해보니 마침 7개 정도였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나의 반항이 내 삶의 원동력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이 모든 무모한 생각이 꽤나 모양새를 갖춘 현실적인 생각이 되고, 조금씩 실현해나갈 수 있었던 계기가 교육대학원이었다. 교육대학원은 그 자체로 학문의 장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직업 교대(Trade)’를 원하는 여정으로서의 첫 관문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 관문의 통과와 함께 나는 세가지 직업을 지나갈 수 있게 됐다.
(다음 화 예고) : Epilogue. 전역증과 석사 학위를 남기고 사라진 20대 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