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당신도 역적이 되길 꿈꾼다.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 중 가장 비극적인 작품 맥베스. 권력을 향한 인간의 탐욕, 그리고 권력을 손에 넣은 후 이어지는 파멸의 결말까지 맥베스는 문학적으로 비극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매력을 선사한다.'
이것이 맥베스를 읽은 사람들의 평가다. 내게 맥베스가 큰 감동과 전율을 선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이 책을 읽은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하고 있다는 점은 내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내가 그들처럼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거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을 배경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학작품을 읽을 때, 더군다나 유명한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긴장을 하는 편이다.
남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대게 안정감을 준다. 남들과 다른 생각, 다른 평가, 다른 시선을 가진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이는 내가 스스로를 왕따가 되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암묵적인 사회의 룰에 갇혀 산다. '저 사람도 나랑 같은 생각일 거야.', '아마 저 사람도 나랑 같은 느낌을 받고 있겠지?', '너무 안타깝다. 이런 안타까운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지.'와 같은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도 똑같다. 내가 사람들에게 화살을 쏘아 대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내게 화살을 쏜다. 당연히 화살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고슴도치로 만들며 살아간다.
만약 내가 고슴도치가 되기 싫다고 피한다면 어떻게 될까? 불행하게도 우리는 알몸으로 태어났기에 다른 사람들이 쏴주는 화살이라도 입지 않으면 변태로 오해받는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외톨이가 된다. 마치 고슴도치들 사이에 태어난 돌연변이처럼 말이다.
맥베스는 역적이다. 왕을 시해하고 왕의 자리에 올랐기에 성공한 역적이다. 마녀들이 맥베스에게 '당신은 왕이 되실 분이다.'라고 예언을 한 부분은 이성계가 꿈에서 통나무 세 개를 짊어지고 걸어갔다고 하니 그 모습이 임금 왕(王)의 모습을 연상한다고 말한 스님의 해몽이나 다름없다. 꿈을 꾸기 이전부터 이성계는 가슴속에 역심을 품었고, 맥베스도 이미 역심을 품은 상태였다.
역적이 될 것인가, 충신으로 남을 것인가를 고뇌하는 맥베스에게 맥베스의 부인은 '당신이 사내대장부처럼 왕을 제껴버릴 수 있다면, 나도 내 젖먹이 아기의 대갈통을 바로 부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왕을 시해하라고 부추긴다. 남자는 자신의 남성성을 의심받으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맥베스는 그 말을 듣고 바로 왕을 죽이러 간다.
맥베스의 역모는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내린 결정이 아니다.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을 뿐, 왕이 되고 무엇을 할 것인지는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치기 어린 역모였기에 맥베스의 결말은 뻔했다. 자신을 누가 죽이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편집증에 시달린다. 의심병이 돋아 자꾸 사람들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게 되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반란군 놈들로 보인다. 그러다 결국 맥베스는 일을 낸다. 반란할 것으로 의심되는 맥더프라는 영주의 일가족을 몰살한 것이다.
맥더프에게 맥베스를 향한 역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맥더프는 반란군이 되었다. 맥베스가 일가족을 죽여버렸으니 맥더프에게 중요한 건 오직 복수뿐이었다. 맥더프는 영국에 피신해 몸을 숨기고 있던 말콤왕자의 반란군에 합류한다. 그리고 맥베스를 향한 복수의 선봉장을 자처하게 된다.
불안해진 맥베스는 마녀들에게 다시 한번 예언을 청하는데, 이때 마녀들은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엄마의 자궁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라면 그 어떤 사람도 맥베스를 죽일 수 없다.'라고 맥베스에게 좋은 예언을 전달한다. 마녀들의 예언적 미신에 심취한 맥베스는 '내가 반란군 놈들 대가리를 다 박살 내버리겠다.'며 호기롭게 전장으로 향하는데... 마침 맞닥뜨린 사람이 맥더프다.
일생일대의 매치 '맥베스 vs맥더프'의 '맥'씨 가문의 매치가 성사된다. 이미 왕국에서 제일가는 무술실력을 검증한 맥베스였기에 초반의 승기는 맥베스의 것이었다. 마녀들이 말했던 '어미가 낳은 사람은 맥베스를 죽일 수 없다.'는 예언을 들먹이며, "누가 나를 이길 수 있겠는가!"라는 포효를 날리는 맥베스. 이에 대항하는 맥더프의 실력은 역시 한 수 아래였다. 그러나 곧이어 맥더프가 말하는 뼈아픈 진실 앞에 맥베스는 결국 좌절하고 만다. 맥더프는 맥베스를 향해 "나는 어미 배에서 일찍 튀어나온 칠삭둥이다. “라며 맥베스의 예언을 반박한다.
결국 자신을 죽일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맥베스는 그만 사기가 땅에 떨어져 버렸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맥더프는 복수의 칼날을 휘둘러 맥베스를 쓰러뜨린다.
이를 굳이 조선시대를 빗대어 말하자면 세조가 한명회한테 칼을 맞고 쓰러진 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조가 칠삭둥이만 아니면 널 죽일 사람이 없다고 용한 승려에게 들었는데, 마침 칠삭둥이가 세조 곁에 있었다. 그게 한명회였다. 그래서 한명회가 맥더프처럼 세조에게 복수를 해야 했다면 세조는 한명회의 칼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결국 마녀들의 예언은 나사 하나만 빠지면 정지하는 정교한 기계에 불과했을 뿐, 맥베스가 의지할 튼튼한 의자는 되지 못했다.
맥베스의 결말은 전통적인 '충성심'이나 '인자하고 너그러운 성군'이라는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결과다. 충성해야 할 왕을 시해했고, 왕의 자리에 올라 신하들에게 자비롭지 못했으며 의심 끝에 신하의 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베스가 비극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쁜 놈이 나쁜 짓하다 죽었다.' 이렇게 단순하게 보면 맥베스의 비극은 비극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 맥베스는 비극일까?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고 작은 부분일지라도 어느 구석에는 맥베스를 품고 살아간다.'라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운명에 저항해보고 싶고, 지금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고, 정해진 사회의 규칙을 깨버리고 싶은 우리들의 욕망은 맥베스를 대변한다.
맥베스처럼 온전히 역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인생에 한 번쯤은 맥베스와 같은 역심을 품는 사람들의 욕망이 맥베스의 결말을 비극으로 느끼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슴도치처럼 잘 살고 있더라도 갑자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몸에 붙은 가시들을 벗어던져 온전히 나 혼자 알몸으로 세상을 달려보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이 있는 사람들이 맥베스의 성공을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
맥베스를 읽고 비극적 감정을 느끼지 못한 한 사람이 자신의 감수성과 능력을 탓하기는 싫으니 억지로 지어낸 변명 같긴 하지만, 나는 맥베스를 비극으로 읽지 못하겠다. 권선징악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스토리가 아닌가? 만약 맥베스가 비극이라면, 나는 맥베스와 같은 역심을 가지지 못했다. 나는 맥베스처럼 운명에 저항할 용기도 없거니와 완전히 파멸해 버릴지 모를 미래를 걸고 도박 같은 승부를 걸 대범함도 없다. 나는 그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고슴도치일 따름이다. 안타깝지만 그래서 나에게 맥베스는 비극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