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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J Apr 16. 2023

EP.13 오늘은 FLEX 하겠습니다.

-  자연암 장비 구입 feat. 암벽화

 쌀쌀했던 날씨가 조금씩 풀리던 3월의 어느 날, 센터장님은 조용히 내 옆에 다가오셔서 말을 거셨다. 

     

“올해는 자연암 나가봐야지? 간다고 하면 특별 교육 해줄게.”     


 그 말에 나는 격한 감동을 받았다. 이 말을 듣기 위해 내가 흘린 피, 땀, 눈물이 얼마던가.. 이 말을 듣기 위해 실력이 늘지 않아도 매일 꾸준히 겁나 열심히 운동을 했더랬지.. 아 잠깐만 나 눈물 좀 닦고..     


작년 이맘때 우리 암장의 보드판에는 하나의 글이 적혀 있었다.     


[2022년 등반학교 개최 참가자는 아래에 이름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S야 등반학교가 뭐야?”

“자연암 등반이요. 센터장님이 자연암에서 직접 교육해 주시는 거예요. 이게 매년 하는 게 아니라서 저도 못했었는데 이번에 꼭 해봐야겠어요. 이거 밖에서 교육받으려면 몇 백 들거든요.”

“와 나도 받을 수 있나?”     


그때의 S의 난감한 표정이란..      


 그렇다 자연암을 등반하려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야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자연암 등반을 욕심을 냈고 결국 내 욕심은 처참히 묵살당했다. 등반 학교 후 암장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연암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무슨 말인지 몰라 끼지 못했던 나. 한동안 우리 암장은 자연암 이야기로 가득했지만 그 이야기에 끼지 못했던 나는 외로운 외톨이 생활을 했어야 했다. 그때의 그 서러움이란..      


 근데 센터장님 입에서 자연암을 가자는 이야기가 먼저 나온 것이다. 엄마! 나 실력을 인정받았어. 나도 드디어 자연암을 등반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거야. 멋지다 나 새끼!!     


 나는 센터장님의 말씀에 당연히 콜을 외쳤고 그런 나에게 센터장님은 한 뭉텅이의 사야 할 물건의 리스트를 보내주셨다. 한국말로 적혀 있으나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한 낯선 용어들이 가득한 장비들. 이게 다 뭐야? 당황했지만 1도 당황하지 않은 척 나는 그 리스트를 받았다.      


 실내 클라이밍은 특별한 장비가 필요하지 않으나 암벽 클라이밍은 다르다. 우선 실내보다 높이도 높고 위험 요소도 많기에 안전과 관련된 장비가 많이 필요하다. 낙석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해 주는 헬멧부터 안전한 등반을 도와주는 자일, 내 몸과 리드 줄을 연결하기 위한 하네스와 데이지 체인, 암벽에서 내려올 때 혹은 다른 사람들의 빌레이를 봐줄 때 필요한 하강기 등등 평범한 일상생활을 한다면 평생 단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할 장비들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그 장비들을 제대로 구매 못할 것 같았기에 나는 S에게 S.O.S를 쳤고 다행히 S는 나의 쇼핑에 동반해 주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S님.     


 사실 나는 장비를 사는 것보다 새로운 신발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더 설렜다. 요즘 운동이 잘 되지 않는 게 아무래도 내 초급 암벽화 때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력이 없으니 신력에 기대는 이 미천한 인간이여..      


 나와 S는 내가 첫 신발을 구매했던 종로로 향했다. 안녕 종로야 오랜만이야. 오늘 언니 신랑 몰래 숨겨놨던 비상금 푼다. 플렉스의 끝을 보여주겠어!     


 우리는 암벽 용품 전문 매장으로 들어섰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암벽화를 보기 시작했다. (S는 그냥 따라온 게 아니었다. 이 아이도 암벽화를 사고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쳐다볼 수도 없었던 형형색색의 화려한 암벽화들 중 내 아이를 고를 수 있다니 이 설렘. 이 행복함. 아 너무 좋다.      


“사장님 저 오늘 암벽 장비 풀로 사거든요. 암벽화 좀 싸게 주세요.”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사장님께 아양 아닌 아양을 떨었고 사장님은 너털웃음을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중 젤 예쁜 아이를 선택한 후 사이즈 선택의 시간. 망각의 동물인 사람의 특기를 발휘하여 나는 반사이즈 작은 신발을 선택했다. 신고 벗는 게 힘들긴 했지만 걸을 만했고 이 전 신발에도 적응했던 것처럼 이 아이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란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나는 구매를 망설이지 않았다. 새로운 나의 예쁜 파트너야! 앞으로 너의 신력을 보여줘! (현재 이 암벽화는 딱 한 번 착용하였으며, 그 한 번의 착용 시 나는 울면서 운동을 하고 다시는 꺼내지 않고 있다는 아무도 안 궁금해하는 TMI..)     


 그 이후 이어진 구매는 하네스. 하네스는 내가 구매해야 할 물건 중 안전과 가장 직결되어 있기에 내 신체에 꼭 맞는 하네스를 사야 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내 눈에 예쁜 것을 골라도 그게 내 사이즈와 맞지 않으면 구매할 수 없었다. 몰랐다. 내 신체 사이즈가 이렇게 엉망인 줄은.. 허리에 맞추면 허벅지가 작고 허벅지에 맞추면 허리가 크고.. 그래서 결국 구매한 것은 허리 허벅지 다 조절되는 XS 사이즈 하네스. 디자인은 일단 눈 감아. 내 안전만 생각하자. 근데 XS 사이즈라니 나 진짜 살이 많이 빠졌구나?      

 

 그렇게 자신감 뿜뿜한 체로 헬멧 구경을 시작했다. 헬멧 역시 안전과 직결되는 물건이라 내 신체에 맞는 것을 구매해야 하는데 헬멧은 하네스 보다 조절되는 폭이 커서 구매가 좀 더 쉽다. 예쁜 디자인을 고르고 S 사이즈 헬멧을 머리에 썼는데 어라? 안 들어가네? 내 머리가 큰 줄 알았지만 이렇게 클 줄이야.       


“아가씨, 하네스는 XS도 크더니 헬멧은 S가 안 맞네?”     


 사장님 혹시 치킨집도 겸업하시나요? 이렇게 뼈 때리기 있으시기예요? 저 너무 아파서 순살치킨 됐거든요? 무안한 웃음과 함께 나는 S 사이즈 헬멧을 사장님께 드리고 M 사이즈의 헬멧을 받아 들었다. 이 편안하고 안전한 착용감. 그래 인정하자. 난 대두다.     

 

 세 가지 상품만으로도 내 진은 다 빠져버렸다. (사실은 헬멧 이후 쇼핑에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나머지 상품들은 속전속결로 구매하기 시작했다. 데이지 체인, 하강기, 잠금 비너, 알비너 등등.. 뭔지 모르시겠다고요? 괜찮아요. 구매한 저도 뭐가 뭔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하하하하.     


 그렇게 나는 신랑 몰래 오랫동안 모아놓았던 내 비상금의 90% 이상을 사용하여 모든 장비 구입을 맞췄다. (장비의 존재로 인해 나는 신랑에게 비상금의 존재를 들키고야 말했다. 그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미 비상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렇게 새삥 장비들을 가지고 집에 가는 순간 얼마나 행복하고 든든하던지..      


 나는 이제 얼른 이 장비들을 사용하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기다려라 자연암이여. 내가 곧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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