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최근 유시민 작가의 신간 책을 읽게 되었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라는 책이다. 직업이 고등학교 과학쌤이라 더 눈에 들어왔고 흥미 있게 읽게 되었다. 특히 거만한 바보에 대해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물론 이 애기는 위대한 물리학자 파인만이 한 애기이지만 인문학자와 과학자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자 내가 학교에서 이과생과 문과생을 가르치며 느끼는 부분이기도 했다. 인문학자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말하지만 과학자는 확실한 진리를 말한다. 이렇듯 층위가 다른 영역에서 주장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문제는 학교 교육과정에서 이과, 문과를 나눠 환원주의적으로 교과목을 세부적으로 쪼개 가르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제 교육과정상 이과 문과는 없지만 학교에서 진로를 상담받고 선택할때 여전히 이런 편향된 인식틀이 존재한다. 일본과 한국 교육과정만 문이과로 나눠 가르쳤는데 이제 교육과정상 사라졌지만 이런 인식틀은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이제는 수업 안에서라도 통합적 틀을 가르치고 세워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본론
1. 인문학과 과학의 차이, 경계선
- 두 학문의 차이를 잘 표현한 문장이 '그럴듯한 해답과 명확한 기준'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문학은 항상 어떤 사안에 대한 분석과 해답을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과학은 엄밀성에 기초하여 말한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모른다라고 답한다. (칸트 인식론의 불가지론) 그래서 인문학이 좀 더 화려하고 시원한 느낌도 들지만 좀 더 깊이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면 헷갈리거나 모호할 때가 있다. 과학은 딱딱 떨어지지만 좀 단순해 보이기도 한다. 아이들 성향도 그러하다. 문과 아이들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언변이 화려하다. 인간 관계도 잘 맺고 새로운 일을 벌이고 열정적이다. 하지만 좀 대충대충하는 부분도 있고 작은 디테일에 약하다. 하지만 이과생은 앞에서 나서서 일을 벌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맡은 일은 꼼꼼히 잘 해내는
스타일 같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있지만 오랜 교직경력상 대체로 그런 것 같다.)이 둘을 잘 합쳐놓으면 참 좋겠는데.. 라는 아쉬움이 있다.
2. 과학사 교과서의 흐름 및 수업
이런 고민 끝에 과학사 수업은 나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는 수업이 되었다. 과학사 본문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 과학 철학, 고대, 중세, 르네상스 과학
- 근대, 현대 과학 이론
- 동양과학사 / 조선 과학
정말 문과, 이과 과목을 잘 합쳐놓은 과목이 아닐까? 싶다.
평소 철학과 역사를 좋아하는 과학교사로 이 과목에 대해 무한 애정을 쏟고 있다. 그리고 이 수업에서만이라도 통합된 인식틀로 바뀌길 바라게 되었다. 다행히 과학사 과목은 진로선택 과목이라 자유롭게 학생들이 선택해서 들어온다. 대략 이과생, 문과생 비중이 6 대 4 정도 된다. 그리고 이과생들이 문과 과목을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데 수업 과목명에 과학이 들어가 이과생들이 좀 더 선호하는 것 같다.
3. 나는 누구인가? vs 나는 무엇인가? (철학적 자아, 물질적 자아)
과학사 수업 첫 시간에 하는 질문이 과학 철학에 대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를 조금만 바꾸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vs 나는 무엇인가?" 앞의 질문이 철학적 자아라면 뒤의 질문은 생물학적, 물질적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테세우스의 배 비유에 대해 설명한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 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생물학적 측면으로 바꾸면 세포는 수명을 다하면 죽고 새로운 세포로 대체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과거의 나가 지금의 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세포단위에서는 모두 다른 세포로 바뀌었는데 정말 과거의 나가 지금의 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여러 생각들을 서로 듣고 난 후에 철학적 자아와 물질론적 자아에 대해 분리해서 설명한다. 내 안에는 철학적 자아로 자신의 인생을 고민하고 선택하는 자아도 있지만 생물학적, 물질적 자아가 있음을 또한 생각하고 이 둘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자아임을 말한다. 인문학과 과학 역시 이런 관계 속에서 수업을 바라봐야 함을 설명할 때 아이들의 눈은 좀 더 반짝인다.
결론
과학사 수업을 통해 철학과 역사, 그리고 과학분야가 어떻게 연결되고 영향을 주었는지 맥락 속에 배우고 체험할 때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틀은 점점 바꿔간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영화 엘리멘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렇게 수업시간에 인문학과 과학의 만남으로 학생들의 인식틀은 점차 확장되고 깊이가 생겨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