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지는 빚

2021. 11. 24.

by 그런썸

아이들과 영화 '원더'의 원작을 요즘 책으로 만나고 있다. 영화를 먼저 본 아이들도 많았고 480쪽이라는 책 두께도 만만치 않아 보여서 이 책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결국 우리 반 차례까지 왔다. 나조차도 처음엔 영화의 이미지가 떠올라 몰입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후반부를 읽고 있는 지금은 '원더'의 감동에 푹 빠져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이들은... 아이들은 매일 1교시 잠이 덜 깬 시간에 교과서를 펴고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나 독후감상문을 쓰는 걸 보면 읽은 걸 얼마나 자기 것으로 소화하며 읽었는지 다 알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암죽을 먹이는 것 같다.


'암죽'은 '몽실언니'를 함께 읽었을 때 배운 낱말이라 이렇게 이야기해도 아이들은 알아듣는다. 나는 매 챕터를 앞서 읽으면서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을 체크하고 이미지나 설명이 필요한 곳은 자료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이 소화하기 쉽게 잘 조리해 놓는다. 그리고 딸깍. 스위치가 켜지면 우리는 책 속으로 함께 이동한다. 중간중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추측하고, 걱정하고, 안도하며 기뻐한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같은 에너지의 흐름을 느낀다.


책 '원더'의 이야기는 4백만 분의 1이라는 제비뽑기로 안면 이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어거스트가 5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학교에 가면서 갖가지 사건에 부딪히며 시작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각 챕터마다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 책만큼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 어거스트를 둘러싼 친누나 비아, 어거스트가 학교에서 만난 친구 서머와 잭, 비아의 남자 친구 저스틴까지, 우리는 책 속의 인물들이 제각기 다른 개인적인 서사를 지니고 있음을 본다. 아이들 입에서 "정말 사연 없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우리는 세상 이치를 책으로 배우고 있는 셈이다.


어거스트가 학교에서 크게 상처를 받고 돌아온 날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누나가 방으로 찾아가 동생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살다 보면 나쁜 날이 있어도 학교에 가야 하는 거야. 알겠어?
중요한 건 우리 모두 그런 나쁜 날들을 견뎌 내야만 한다는 거야."


'학교' 대신 '삶'을 넣어도 충분히 울림 있는 메시지다. 나는 이 말을, 이 부분을 읽은 날 써먹었다. 요새 한창 졸업 영상을 찍고 있는데 자기가 여행을 다녀 온 동안 아이들이 정한 배경음악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남학생 한 명이 삐딱하게 굴더니 오늘은 결국 눈물까지 보였다. 영리하고 재치있는 아이여서 졸업 영상도 잘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으리라.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방과 후에 아이와 단 둘이 남아 이야기하면서 '원더'에서 읽었던 이 문장을 가져왔다.


"살다 보면 학교에서 힘든 날도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그런 날들도 견뎌 내야만 해. 그런데 그건 너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단다. 선생님은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할 거야. 오늘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보고 우리 내일 다시 얘기해 보자." 학급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마주하면서 우리가 함께 읽은 책 속의 문장보다 더 좋은 지침서가 있을까?


3년째 6학년을 맡고 있지만 내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 같은, 다 큰 아이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서늘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곧잘 책 속의 문장으로 숨는다. 가장 편안한 공간, 나를 나답게 해 주는 책 속의 공간에서 나는 활개를 치며 자유롭다. 아이들은 나를 책을 좋아하는 선생님으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살기 위해 책을 들었었고 책 속의 문장들로 겨우 중심을 잡고 산다. 도대체 나는 책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사는 걸까. 은혜를 갚는 길은 아마도 아이들과 함께 계속 책을 읽는 것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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