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만 가득한 방에서 갑자기 만국기가 펄럭이는 공간 속으로 밀려들어온 듯한 어리둥절함을 느낀다.
정서적 멀미라고 해야 할까! 좀 울렁거리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한 정서적 상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인간은 결국 다 같구나. 마치 다른 옷을 입고 있지만 벌거벗으면 마찬가지이지,라는 좀 더 담대하고 단순한 사유에 이르면서 정서적 멀미가 진정된다.
결국은 ‘인간이라는 대 전제 앞에 다 같다’라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 마음의 렌즈에 담았던 것 중 하나는
바로 부모의 눈빛은 만국 공통어라는 것이다.
공항에서, 로마의 거리에서, 몰타의 발레타에서, 몰타의 세인트 줄리언스에서 곳곳마다 마주하게 되는 부모와 아이.
확실히 아이들이 귀한 한국보다는 유럽은 부모와 아이들의 모습이 많았다. 물론 여름휴가 시즌이라 공항, 관광 명소 그리고 리조트 등에서 가족 단위의 사람들을 마주하기 쉬운 상황이기도 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여행에서 특히 부모와 자녀의 모습이 나의 감성을 자극했다.
부모의 눈빛.
신기하게도 다른 피부, 다른 머리색, 다른 체구,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쩜 그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부모의 눈빛에서는 빛이 나온다. 오뉴월 햇살 같은, 부드러운 코튼 같은, 감미로운 눈빛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어리거나 크거나 상관없이 같은 눈빛이다. 깊고 그윽한 눈빛,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눈빛.
아이는 부모의 눈빛을 바라보기도 하고, 흥미로운 다른 것에 빠져서 부모가 바라보는지도 알아채지 못하기도 하지만, 부모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아이의 동그란 작은 어깨를 바라본다. 그 눈빛을 느끼는 걸까? 아이는 문득 부모와 눈을 마주친다. 부모의 눈가에 잔잔한 주름이 잡히며 웃어준다. 아이도 웃는다.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 전경. 휴가철이라 매우 분주한 모습
몰타는 지중해의 작은 나라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직항으로 가는 비행기가 없다. 우리 가족은 로마에서 며칠을 지내고 몰타로 가기로 했다. 열흘 먼저 이탈리아 페루쟈에 가 있었던 딸과 로마의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14시간 비행 끝에 내린 로마의 피우미치노 공항의 제3 터미널.
나와 신랑은 미리 와 있는 딸을 찾느라 출국 장의 문이 열리자마자 분주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휴가철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상황에서도 멀리서 손을 흔드는 딸아이가 한눈에 보인다. 자기 자식은 한눈에 보이나 보다! 부모의 안테나의 효과 입증! 열흘 만인데도 무슨 이산가족 상봉 마냥 우리 셋은 얼싸안았다.
한국에서는 아직은 부모가 위풍당당하게 앞섰으나, 이번 여행에서는 완전 반대가 되었다. 영어가 짧은 나와 더 짧은 신랑은 여러 언어에 능통한 딸의 뒤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는 서둘러 우버택시를 검색해서 컨택하고 미리 예약한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통화를 하느라 분주했다.
우리는 아이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았을지! 여행 중 마주한 다양한 인종과 나라의 부모들의 눈빛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공항 의자에서 잠에 취해 투정을 부리며 엄마의 품을 파고드는 아이를 바라보는 수염이 목까지 덮은 아버지의 눈빛,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천지창조를 보느라 고개를 꺾어 보는 여드름 난 아들을 바라보는 허리 살 두툼이 오른 엄마의 눈빛, 트레비 분수 앞에서 젤라토를 먹는 아이의 입가를 닦아 주는 젊은 아빠의 눈빛, 지중해 해변에서 셀카 삼매경에 빠진 숙녀 딸을 입가에 미소 가득 한 채 바라보는 살짝 잔주름이 지기 시작하는 엄마의 눈빛. 그 수많은 눈빛들.
인종과 국가의 가늠이 안 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곳에서 하나같이 같은 눈빛을 발견했다.
그 인상적인 부모의 눈빛 중에 기억에 또렷이 남는 장면이 있다.
로마에서 몰타로 가기 위해서는 로마피우미치노 공항의 제1 터미널을 이용해야 한다. 유럽 내에서 주로 이용하는 공항이다 보니, 동양인은 우리 밖에 없나 보다 싶었는데 유일하게 일본인 엄마와 아들이 눈에 띄었다. 10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 파마머리의 귀여운 아들과 검은 똑 단발머리의 자그마한 체구의 엄마. 그 게이트에서 수많은 인파 중 동양인은 우리 가족 세 명과 그 모자가 유일했다.
크지 않은 눈에 얇은 붓으로 그려 넣은 것 같은 인상적인 쌍꺼풀 눈매가 똑 닮은 모자.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유럽인들이 대부분인 로마의 피우미치노 공항 제1 터미널. 작은 동양인 엄마는 약간 경계, 위축된 표정과 눈빛으로 아들을 계속 응시하며 손으로 아들의 작은 어깨를 감싸고 게이트에 서 있다. 아들은 해맑은 눈빛과 자유로운 태도로 엄마를 바라보며 뭐라고 계속 웃으며 말한다. 장난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빛과 약간의 걱정과 안심, 그리고 긴장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아들의 재롱에 미소를 머금고 아들을 바라보는 작은 동양인 엄마의 눈빛. 작은 아들은 마치 그런 엄마의 마음을 다 이해하는 듯,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듯 엄마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재잘거린다.
서로를 바라보는 엄마와 아들의 눈이 기가 막히게 똑 닮았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모습이 나에게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소설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였다. (엄마는 글로벌한 상황에 그다지 익숙한 느낌이 아니었고, 아들은 상당히 익숙한 태도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 아들을 글로벌하게 잘 키우려고 애쓴 엄마의 노고가 상상됨)
여행스케치를 위한 연재의 첫 1화를 ‘부모의 눈빛’으로 정한 것이 약간 의아스러울 수 있겠다.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으므로 여행 중 인상 깊었던 부모와 아이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없었음에도 첫 화를 이 주제로 삼았던 이유는 나에게 여행은 곧 인생의 한 조각이고 여행과 인생의 닮은 꼴(나의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 브런치 스토리 매거진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이라는 사유에서부터 이 연재가 시작되다 보니, 조금은 독특한 시작으로 첫 발을 떼게 되었다.
몰타의 수도 발레타의 구시가지 중심지역 전경
지중해 바다의 석양, 저녁 8시경 전경.
아름다운 지중해, 경이로운 바티칸, 신비하고 순수한 몰타. 이번 여행은 수많은 볼거리와 흥밋거리 그리고 힐링 포인트가 많은 여행임에 분명했다. 카메라 렌즈만 대고 찍으면 예술인 장면 장면들.
그 수많은 아름다움 중에서 나에게 단연 최고의 아름다움은 역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에 담긴 가치들. 눈길을 머물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그것을 따라가는 지중해 여행의 발걸음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