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로 치자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지만, 영어는 그냥저냥, 이태리어는 거의 백치에 가까우니, 로마와 몰타 자유여행에서는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입이 안 떨어지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웃는 표정으로 치자면 또 빠지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서 일단 웃었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이렇게 말했다.
‘땡큐’ 또는 ‘그라찌에(grazie)’
로마에서는 주로 웃음과 '그라찌에!'
몰타에서는 주로 웃음과 '땡큐!' (몰타는 몰타어가 있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
우리 딸은 내가 남발하는 ‘그라찌에’를 흉내 내며 웃는다.
"엄마의 ‘그라찌에~’ 발음이 딱 경상도 사투리 같아!" (참고로, 나는 경상도가 고향도 아닌데)
이번 여행에서 얼마나 ‘땡큐’와 ‘그라찌에’를 무한반복했으면 한국으로 돌아오는 아시아나 비행기에서 우리나라 승무원에게 나도 모르게 ‘땡큐’라고 하지 않았겠나!
지중해는 뜨거운 태양의 기질을 DNA에 장착해서인지, 사람들이 일단 뜨겁다. 기질의 온도라는 것이 있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의 온도가 순위 3위 안에는 들지 않을까 싶다. 웃기도 잘하고, 말수도 많고, 제스처도 크다. 이탈리아 말은 억양의 파도가 커서 그런지, 언어가 춤추는 느낌이다. 그래서 노래를 잘하는 것인가? 이탈리아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서 금방이라도 ‘오 솔레미오♬’가 튀어나올 것 같다.
바티칸 주변 도로변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지붕
웃으며 그라찌에! 남발하다가 황당(?) 했던 에피소드 하나.
펩시콜라? 오, 그라찌에! 했다가 이런!!.
로마여행의 핵심이자, 나의 심장을 뛰게 하는 바티칸 투어(바티칸 관련해서는 제3화를 기대해 주세요!)를 마치자 더위와 허기가 몰려왔다. 우리 가족은 바티칸 근처에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을 찾았다.
다행히 점심 피크시간이 조금 지난 때라 자리가 있었다.
라자냐와 샐러드 등등을 음료와 함께 주문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종업원이 에브리띵 오케이?를 연발하며 자주 우리 테이블로 온다. 우리 가족 중 이런 사회적 반응 속도가 가장 빠른 나는 입에 라자냐를 우물거리다가도, 컵을 입에 대다가도 함박웃음과 함께 ‘그라찌에!’를 외쳐주었다.
종업원은 빵 더 필요해? 뭐 줄까?를 계속 묻다가, 내가 마시던 펩시콜라 잔이 비워지자 친절하게 ‘콜라 더 줄까?’해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리필인 줄 알고 오 땡큐! 그라찌에!(역시 함박웃음과 함께)라고 반사적으로 말했다. 종업원은 지중해 햇살보다 환한 미소를 보이더니 엄지 척을 하며 돌아섰다.
그때 딸이 조용히 복화술에 가까운 말투로 말했다.
“엄마 이거 그냥 주는 거 아니야.”
“뭐? 나한테 눈치를 주지!”
“엄마가 얼마나 빠르게 그라찌에를 말하던지 말할 틈이 없었어.”
조금 뒤 종업원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콜라 한잔과 함께 돌아왔다. 어쩌랴! 나는 또다시 강도는 좀 줄었지만 웃으며 ‘그라찌에!’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종업원이 빛의 속도로 크게 대답한다. “그라찌에!”
바티칸 주변 식당에서(두 잔째의 콜라)
그 순간, 식당벽에 걸려있는 TV에서는 파리올림픽 양궁시합이 방영되고 있었다.
양궁혼성 경기 상황. 그런데 두둥! 이렇게 재밌는 상황이!
화면에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선수의 모습이 화면에 등장했다. 뒤이어 이탈리아 선수들이 보인다.
로마 식당에서 한국과 이탈리아 양궁 경기를 실시간 관전하다니, 역시 인생은 재밌는 우연이얼마나 많은가! 아슬아슬한 순간은 있었지만, 역시 양궁의 제국답게 우리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우리 가족은 이곳이 이탈리아라는 것을 잠시 잊은 채 ‘와’ 환호성을 질렀다(물론 한국에서라면 열 배는 큰 소리로 환호했겠지만, 나름 에티켓을 지킬 줄 아는 가족이므로 눈치껏!).
비록 리필 콜라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의 멋진 승리를 자축하는 콜라의 맛은 끝내줬다.
바티칸은 역시 너무 멋졌고, 이제 배도 든든해지고, 더위도 식혔고 무엇보다 이탈리아 한복판에서 우리나라의 멋진 승리도 관전하였더니 절로 신이 났다.
왼쪽 한국 vs 오른쪽 이탈리아
나는 바티칸 베드로 성당 지붕이 보일 만큼 고개를 높이 들고 지중해 태양만큼 환하게 웃으며 이 말을 당당히 외치며 식당을 나왔다.
“땡큐! 그라찌에!”
이번 여행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땡큐’ ‘그라찌에’는 과연 몇 번이었을까? 적어도 수백 번은 되었을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짧게라도 소통했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하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많은 말들 중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얼마나 따뜻하고 예쁜 말인지!
로마 스페인광장 주변
덧붙이기)
뽀득여사의 호기심 실험
미소와 찰떡궁합인 말!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미소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분리하면 어떻게 될까?
호기심의 일환으로 거울 앞에 섰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1번 무표정, 2번 화난 표정, 3번 웃는 표정으로 말해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는 반드시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평소 이 말을 할 때 억양을 유지하도록 애써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한 번 시도해보시기를 바란다!
1,2,3 표정에 따라 말의 억양(뉘앙스)이 달라졌다. 실험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번 재시도를 해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