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앤, 너를 만나러 갈까?
꽤 오래전, 한국 밖 세상이 궁금해 몸이 근질근질하던 나는 다이어리 맨 앞장에 가고 싶은 해외 여행지 리스트를 작성했다. 이 리스트의 대부분은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가기, 나이아가라 폭포 가기, 그랜드 캐니언 가기, 혼자 배낭 하나 짊어지고 로마 콜로세움 가기 등 여행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오랫동안 간절하게 꿈을 생생하게 시각화해서인지, 살면서 한 번은 갈법한 유명 관광 명소를 나열해서인지 나는 삼십 대 초반에 그 리스트 대부분을 이뤘다.
크고 자신 있게 위쪽에 적혀있는 유명 관광 명소들과 다르게 아래에 소심하게 적혀있는 여행지도 있었는데, 바로 소설 <빨강머리앤>의 배경이 되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Prince Edward Island)이었다. 캐나다 귀퉁이에 있는 아주 작은 섬으로 내 평생 전혀 가볼 것 같지 않은 곳이었다. 한국에서 가기에 만만치 않고, 딱히 볼 것이 없으니 여행 동지를 찾기도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도 프린스 에드워드 섬은 언제나 버킷리스트의 아랫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기회는 뜻밖의 순간 찾아왔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와 한창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남편이 다가오는 나의 생일에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방문하자고 제안을 했다. 남편은 이미 항공편과 숙소, 렌트 차량까지 알아둔 터였다. 나에게는 생일선물이라고 했지만 많은 고민이 들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꼭 한번 가고 싶은 섬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마이너스가 나는 우리의 형편이 신경 쓰였다. 무엇보다 2살 된 아이와 2번 비행기를 갈아타 가는 것이 과연 "선물"일까 의문이 들었다. 선물이라기보다는 "벌칙" 아니 "형벌"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가기로 했다. 아이가 24개월 미만이었기 때문에 항공권이 무료였다는 점도 여행을 결심하는데 한몫했다. 그렇게 몇 남지 않은 버킷리스트가 마저 채워졌다. 그리고 여행을 준비하며 나는 왜 그곳에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건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선명한 천연색이 아니었다. 흑백이라기보다는 잿빛에 가까운 기억들이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어서일까? 어쩌면 형광등을 켜지 않으면 대낮에도 캄캄했던 집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더군다나 내가 자란 동네에서 볼 수 있었던 녹음이라고는 담장 너머 있는 학교 안 나무들뿐이었고, 다닥다닥 지어진 흙집 사이 골목으로는 빛이 들지 않고 항상 그늘이 져 있었다.
자란 환경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도 공주 이야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풍부한 상상력과 동심을 동원해도 동화 속 공주님과 나의 거리감은 도무지 좁혀지지 않았다. 아무리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유리구두를 신고 있는 나를 상상해보아도, 춥다며 방문에 비밀 막을 빨래집게로 걸어놓은 낡은 한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TV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빨강머리앤>을 보게 되었다. 나와 비슷하게 외롭고 사랑받고 싶고, 투박하고 낡은 무채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못생긴 여자아이가 주인공이었다.
1화의 내용은 그 아이가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있는 에이본리(Avonlea)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에이본리의 마을은 초록빛과 푸른 빛으로 가득했고 앤이 사는 집 역시 초록색으로 칠해진 집이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좁은 방에서 나는 그렇게 선명한 색깔에 빠져들었다. 그곳은 여전히 푸른 빛으로 가득할까?
프린스 에드워드 섬 공항은 아주 작았고, 그곳에서 샬럿타운 시내까지는 금방이었다. 숙소에 들어서니 숙소에 들어가니 바다와 요트 선착장이 한눈에 보였다. 큰 창으로 보이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풍경은 정말 선명한 색깔로 가득 차 있었다. 호수와 바닷가는 푸르고 반짝였고, 흙은 붉었다. 푸른 숲과 들이 펼쳐져 있고, 하얀 요트와 크루즈가 왔다 갔다 했다. 무채색으로 가득 찼던 나의 어린 기억을 선명한 색깔로 물들여주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 나를 위로해주었던 오랜 친구를 만나러 드디어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왔다. 그리고 이 섬과 오랜 친구가 주었던 위로를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가난하고 특이한 아이여서 외로웠던 나의 유년 시절을 위로해주었던 나의 마음의 벗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기록이 당신을 위로해주길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Q. 현실적인 제약이 아무 것도 없다면 당신을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앤의 따뜻한 말이 필요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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