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여행을 마음껏 즐겼어요
소설 <빨강머리앤>'은 노바 스코샤(Nova Scotia) 주의 고아원에 있던 앤이 기차를 타고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앤과 매슈는 에이본리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인 브라이트 리버(Bright River) 역에서 만나기로 한다. 스펜서 부인이 흰모래마을(White sands)로 가는 길에 브라이트 리버 역에 앤을 내려주면, 매슈가 마차를 끌고 가서 앤을 데려오기로 한 것이다.
앤과 매슈가 처음 만났던 기차역의 실제 이름은 켄싱턴 기차역(Kensinton Train Station)이다. 나는 여행 일정에 이 작은 기차역 방문도 포함하였다. 별 볼 것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누추한 매무새로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가족이 될 사람들을 만나야 했던 앤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이곳에서 앤은 매슈가 혹시나 안 오면 어쩌나 걱정하며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환영하고 받아줄까 싶은 걱정과 긴장을 느끼면서 말이다.
켄싱턴 기차역에는 현재 열차가 다니지 않는다. 대신, 작은 기차역 건물은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선로 저 끝에는 전시용으로 증기기관차가 서 있었다. 딱히 할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괜스레 승강장 벤치에 가만히 앉아보기도 하고, 선로를 따라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의 손을 잡고 걷기도 했다. 만약, 매슈가 오지 않으면 그 위에서 밤을 지새우겠다던 벚나무는 어디쯤 있었을까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말이다.
매슈를 만나는 이날은 앤에게 있어 인생 일대의 중요한 날이다. 고아원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했던 앤을 받아줄 가족을 드디어 만나는 것이었다. 이날, 앤은 자신의 매무새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하지만 앤이 가진 것은 볼품없이 몸에 꼭 끼는 원피스뿐이었다. 한 상인이 누런빛의 옷감을 무려 300마나 고아원에 기부하였고, 덕분에 모든 고아원 아이들이 같은 원피스를 입었다. 그나마도 옷감이 넉넉지 않았는지 옷은 아주 짧고 몸에 꽉 끼었다. 거기에 앤은 색이 바래고 납작한 밀짚모자를 썼고, 다 해진 구식 여행용 가방을 들고 와야 했다. 그런 차림을 한 엔은 기차에 오르자 사람들이 자신만 쳐다보며 불쌍히 여기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빨강머리앤을 여러 차례 읽어도 이 장면에서 나는 늘 먹먹해졌다. 나 역시 앤과 같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평일에야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면 되니 큰 걱정은 없었다. 동네 시장에서 산 운동화가 금세 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신기만 하면 또래 친구들과 크게 옷차림이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주말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나는 괜스레 옷장을 뒤적였다. 마치 내가 발견하지 못한 그럴듯한 옷이 어디선가 튀어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지만 봄이 될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옷장 속에서 씨름해보지만, 겨우내 나는 늘 똑같은 옷을 입고 교회에 나갔다. 유일하게 멀쩡한 긴 바지인 청바지를 입고, 누군가에게 물려 입은 낡은 잠바를 걸치고, 말이다. 그렇게 교회에 가면 예배시간 내내 같은 반 여학생들의 겉옷에 자꾸 시선이 갔다. 가난한 동네에 살았던 탓에 브랜드 있는 외투를 입은 아이는 없었지만, 그래도 다들 명동이나 이대에서 몇만 원을 주고 구매한 얇은 코트는 입고 있었다. 싸구려 코트를 걸친 아이들은 옷에 붙은 먼지를 수시로 떼기도 하고, 서로의 옷을 칭찬하며 교회 옥상을 괜스레 우르르 몰려다니곤 했다. 어쩐지 대화에 끼지 못한 나는 낡은 잠바의 소매 끝만 쳐다보곤 했다.
앤은 주눅이 들 때면 멋진 상상력을 동원하여 스스로 결핍을 채워주었다. 몸에 꽉 끼고 낡은 누런빛 원피스를 입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멋진 드레스를 입고 있다고 상상하며 여행을 즐겼던 것처럼 말이다.
상상을 통해 자신을 위로해줄 뿐만이 아니었다. 볼품없는 차림에도 당당했던 앤이 좋았다. 앤은 예순이 넘은 매슈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며 통성명을 하고, 유쾌하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앤의 낡은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매슈에게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물건을 설명한다.
“아, 제가 들게요. 무겁지 않아요. 가방 안에 제가 가진 걸 전부 넣었지만 무겁지 않아요. 그리고 잘못 들면 손잡이가 빠져요. 그러니까 제가 드는 게 나아요. 저는 요령을 정확히 알거든요. 이건 엄청나게 오래된 가방이에요.”
내가 초라하고 웅그려졌던 순간, 이따금 빌렸던 앤의 상상력과 당당함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Q. 너무 힘든 순간을 잊을 수 있었던 즐거운 상상이나 희망이 있었나요?
앤의 따뜻한 말이 필요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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