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시골 살기 2
시골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제일 좋은 것 중 하나는 정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살던 고향집과 바로 전에 살던 타운하우스를 제외하고는 줄곧 아파트 생활을 했었다. 도심 속의 타운하우스도 차 한 대 크기의 작은 테라스만 있었을 뿐, 정원이라 할 수도 없었다. 이 시골집에는 넓은 잔디 마당에 꽃나무들과 한쪽에는 화분들이 옹기종이 모여있고 작은 화단에는 하얀 데이지 꽃과 이름 모를 야생화들, 그리고 전 주인이 심어 놓은 쪽파가 자라고 있다. 아직 볼 수 없지만 6~7월에 피는 멋진 수국도 심어져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정원이 예쁘다면서도 손이 많이 갈 거라며 걱정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아파트와는 달리 많이 부지런해져야 한다. 마당에 잡초도 수시로 뽑아 줘야 하고 나무들 가지치기도 해야 한다. 바지런하신 전주인 덕에 아직도 정원은 예쁘게 정돈되어 있다.
이삿짐이 많은 탓에, 일요일마다 풀지 못한 짐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다. 정원 바로 옆, 큰 선룸에는 풀어야 할 많은 상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청명한 일요일 오전, 봄이라는 걸 증명하듯,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햇살을 품은 정원으로 남편과 나는 커피 한 잔씩 들고 나가려는데, 엄마 껌딱지인 둘째 고양이 벤지하고 호기심 많은 첫째 보리가 우리를 따라 나오려 했다. 밖에 나갈 때마다 항상 같은 상황. 그래서 가끔은 현관문을 둘러싼 작은 선룸까지만 나오게 했다.
고양이의 안전을 위해 목걸이를 걸어 주었지만, 싫어하고 답답해하는 것 같아 몇 번 걸어주다가 포기했다. 그래서 정원에 나갔다가 탈출(?)이라도 하면 아이들을 잃어버릴까 봐, 또는 해충이나 곤충들 때문에 다칠까 하는 걱정에 밖에 내보내길 꺼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남편과 나는 작은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공기도 신선하고 볕도 너무 좋아 아이들도 이런 날씨를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문이 열리자, 갓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들처럼, 쫄보 녀석들이 조심스럽게 첫 발을 내딛는다. 고양이들에게 정원을 탐색할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킁킁거리며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면서 점점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그러다 날아가는 새를 본 보리가 냉큼 쫓아간다. 새가 날아간 나무 꼭대기를 잠시 멈춰서 보더니 다시 돌아온다. 아직도 정원에 적응 중인 덩치 큰 막내는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눈치다. 보리는 현관 쪽으로 돌아오면서 또 뭘 봤는지 얼른 데크 위로 뛰어오른다. 그러고는 나무에 기대어 위를 본다. 벤지는 그런 보리를 따라 같은 곳을 보며 앉는다. 분명 벌이나 나비를 본 것 같다, 아님 거미라도.
우리는 고양이들이 정원 밖으로 나갈까 봐 보초를 서면서도 잠시나마 야생의 삶(?)을 즐기는 고양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30분 정도 놀다 들어가자 하니, 흙이 묻은 발로 얼른 안으로 따라 들어온다. 아마도 갑작스럽게 열린 새로운 세계의 현란함이 조금은 버거웠던 것 같다. 이젠 고양이들에게 자유가 거두어졌다. 제한적이긴 했지만 잠시나마 정원에서 누렸던 자유!
물론, 나의 의지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주어지고 거두어진 것을 진정한 자유라 할 수는 없다. '자유'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의미라면 고양이들에게 진정한 자유란 곧 이 시골집을 탈출하는 것이리라. 자유를 찾아 야생으로 탈출한다면... 쫄보 녀석들, 하루나 견딜 수 있을까?
벌써 집사 생활을 한 지 5년 차에 접어든다. 그러고 보면 정말 신기한 묘연이 아닐 수 없다. 몇 년 전, 해외에서 생활했을 때, 딸아이가 한국을 무척 그리워하며 외로워했다. 그런 딸을 위해 남편은 아이가 좋아하는 고양이를 입양하자고 했고, 나는 반대했다. 강아지는 괜찮아도 고양이는 안 된다고 했다. 고양이가 무서웠고, 부정적인 편견에 매여 있어서 키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딸을 위해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 선택(?)은 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놀랄 정도로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게 된 것이다.
사실, 가장 놀란 건 나 자신이다. 고양이를 통해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사람이 이렇게 극적으로 바뀔 수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5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신성시 여겨 고양이 형상을 한 신들의 조각상도 만들어졌고, 고대 무덤에서는 고양이 미라도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인간과 묘연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됐음을 보여 주는데, 다 고양이가 지닌 마성의 매력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 아이들, 고양이라는 종을 떠나 이제는 내 아이들 같은 존재가 되었다. 지금은 이 녀석들이 없으면 내가 하루도 못 견딜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아이들이 별이 될 순간을 생각하면.
이런! 또 미리 걱정하는 못된 버릇이 나왔다. 그저 시골 아줌마, 시골 고양이가 되어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 생각만 하자. 햇살을 품은 정원이 온세계를 품은 듯 오늘따라 더욱 넓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