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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Oct 23. 2024

시골 책방에서 '텅 빈 충만'을 느끼다

제주도 시골 살기 10

  흐리고 바람이 잔잔하게 부는 일요일 오후다. 나는 밀린 청소를 끝냈고, 남편은 그새 자란 잔디를 깎고 뒷정리 중이다. 오늘은 학교에 밴드 연습을 딸아이를 픽업해 책방투어를 떠난다. 신기하게도, 도시에 살 때 거의 가지 않던 책방을 제주 시골에 와서 더 자주 찾게 된다.


  우리 시골집 근처에는 차로 10~15분 거리에 작은 도서관과 독립 서점이 여러 곳 있다. 이 책방들은 대개 오래된 민가나 농가, 또는 창고의 외관을 유지하면서 내부를 개조해 만든 곳이다. 그래서 가는 길이 꼬불꼬불한 시골길이기도 하고, 대로변에서 떨어진 좁은 골목길이기도 한다.


  처음 간 책방은 여러 갈래로 난 시골길로 지나야 해서 길을 잘못 든 적도 있었다. 다행히 큰 마당이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어 주차는 편리했다. 5~6년 전에 문을 연 그 책방은 너무 유명해져서 갈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름 큐레이션도 잘 되어 있고, 사진 찍기 좋은 감성적 공간도 많아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다. 근처에서 제일 크고 외관도 멋진 그곳을 몇 번 방문했지만, 갈 때마다 관심 있는 책들이 줄어들어 아쉬웠다.


  그래서 오늘은 해안가 포구에 위치한 작은 책방에 가기로 했다. 블로그 리뷰를 보니 작지만 꽤 유명한 곳 같았다. 그런데 책방 크기가 '세 평'이라니! 사진을 보고도 감이 오지 않았다.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흥미로운 곳일 것 같았다. 10킬로를 운전해 포구에 도착했다. 책방이 좁은 골목길에 있어 포구에 주차해야 했다. 집 정원에서 잔잔하던 바람이 해안가에 오니 거세게 불고 있었고, 바다는 은빛 거품을 토해내며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책방 가는 길


  포구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좁은 골목길을 따라갔다. 책방 가는 길에는 낡은 농가와 모던한 가옥이 돌담길을 내주며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쌀쌀한 날씨를 의식한 듯, 돌담은 담쟁이덩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런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뒤쳐진 사이, 남편과 딸은 벌써 책방 앞에 도착했다. 둘은 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나를 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거센 바람을 피하려 미닫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골목길에 숨어 있는 이 작은 책방은 지도를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작은 귤창고였던 걸까? 외관을 그대로 살린 책방은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담쟁이덩굴이 운치 있게 휘감고 있었다. 문 위쪽으로 녹슨 작은 간판과 미친 듯이 나부끼는 깃발이 눈에 띄었다. 그 파란색 깃발에 적힌 '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있다'라는 글귀는 책방을 가리키는 듯했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기 직전, 남편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내가 들어서자, 세 평짜리 비좁은 공간은 책 반, 사람 반으로 이미 가득 차버렸다. 책방 사장님인 듯한 여성이 카운터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고, 중년의 손님은 책을 고르고 있었다. CD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한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책방 속 가을 액자


  작은 공간이지만, 책은 오목조목 알차게 꽂혀있었다. 그새 책을 고른 손님은 떠나고,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찬찬히 책을 둘러보았다. 좁은 공간 덕분에, 책과 나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사장님이 요즘 핫한 한강 작가의 작품을 내게 추천해 주셨지만, 이미 전집을 구매해 거의 다 읽은 터라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바람이 이 작은 서점에도 불고 있음을 체감했다. 그러고 보니 작가가 운영하는 그 서울의 책방도 세 평 남짓이라 했던가!


  제주에 살고 있는 만큼, 책방에 가면 제주 관련 서적을 찾게 된다. 한 공간에 따로 비치된 제주 신화에 눈길이 멈추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사장님은 현재 절판된 귀한 책이라며, 제주 오름 사진첩과 함께 추천해 주신다. 그 책은 제주의 여성 문화를 알리는데 공헌하고 있는 제주 출신의 김순이 시인이 쓴 책이다. 제주에 신이 무척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와 관련된 흥미 있는 도서라 구입하기로 했다. 제주의 문화를 알리는 이런 희귀한 책이 절판됐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두 권의 절판 도서와 여성 환경운동가, 덴마크 관련 서적 등 몇 권을 추가로 구입했다. 원하는 작가의 에세이집이 없어서 이 기회에 다른 작가의 글을 읽어 새로운 시각을 느껴 보기로 했다. 사장님은 근처 도서관에서 열리는 북토크와 책방의 작가 사인회 등 여러 행사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책방은 작지만 단단한 껍데기 속 달팽이처럼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읽은 책이 생각난다. 《무소유로 유명하신 법정 스님의 또 다른 명저 《텅 빈 충만》이라는 수상집이다. 아직도 뒤표지의 사진과 글귀가 기억에 남는다. 사진에는 창호문을 통해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아담한 방 한쪽 구석에는 작은 좌식 책상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원고지와 펜 같은 글쓰기에 필요한 용품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스님의 단출한 방인 듯했다. 뒤표지에 적힌 멋진 구절을 옮겨 본다.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있기 때문에

가득 찼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충만하다


  읽을수록 단어의 깊은 맛이 느껴지고 가슴이 설렌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그 비워냄이 주는 정신적 풍요를 절제 있고 아름다운 필치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다.


  서울의 대형 서점에 가면 정말 책이 이렇게 많나 할 정도로 다양한 서적이 태산을 이룬다. 물론 독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장점이 있지만, 때때로 그 양에 압도되어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막막할 때도 있다. 이런 큰 서점과 비교할 수 없는 세 평짜리 책방은 거의 텅 빈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아담한 공간에 진열된 책들은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이미 내게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여기서는 오롯이 책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에 응답하는 나의 내면의 소리는 차츰차츰 퍼져나가 내 몸속에서 충만해진다.


  책 한 꾸러미를 품에 안고 언덕을 내려오는 길, 작은 시골 책방에서 느껴진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해안가에서 불던 거센 바람이 점차 잦아들며, 오늘의 책방 투어는 내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과 함께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안겨 주었다.


책방에서 건저 올린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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