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정원에 발자국을 심다

제주도 시골 살기 21

by 새벽별

2월이 되니 겨울이 한층 깊어졌다. 입춘이 지나자마자 눈보라가 몰아치더니, 이 시골 마을에 유례없이 많은 눈이 내렸다. 바람이 심하니 눈송이들은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흩날렸다. 하늘과 바다는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어 경계조차 사라진 듯했다.


기름배달 온 주유소 직원은 "이 동네에 이렇게 눈이 오는 건 드문 일이에요" 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추위를 견디기 어려운 듯했다. 그동안 눈이 오지 않는다며 불평했더니, 혹시 제주의 신이 노하신 걸까?


캐나다에서 여러 해 동안 혹독한 겨울을 겪었던 나에게 이 정도의 눈은 마치 장난스러운 아양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덧 따뜻한 날씨에 익숙해진 탓인지, 며칠 째 이어지는 눈이 은근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눈을 불청객처럼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집안의 고양이들이었다.


택배를 가지러 나가려는데, 고양이들이 밖에 나가고 싶다며 떼를 썼다. 결국 문을 열어주자, 녀석들은 잽싸게 뛰어나갔다. 그런데 현관 데크 앞에 쌓인 눈을 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지난봄 고양이들이 처음으로 마당에 나왔던 날이 떠올랐다. 문을 열었을 때, 새로운 세계의 현란함과 경이로움에 놀란듯한 모습이 생생했다.


내가 먼저 밖으로 나오자, 첫째 보리는 한 발을 눈 위에 살포시 내려놓다가 차가운지 재빨리 안으로 들였다. 그것도 잠시, 사냥꾼의 기질을 타고난 녀석은 눈 위에 귀여운 발자취를 남기며 정원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보리가 용감하게 나오자, 콧바람만 실컷 쐬던 둘째 벤지도 쭈뼛쭈뼛 따라 나왔다. 우리 발자국을 보자, 옛 동요가 생각나 개사해 흥얼거렸다.


"하얀 눈 위에 단화 발자국

보리벤지 같이 간 단화 발자국"


고양이의 발자국은 작고 사뿐하며 품위가 넘쳤다. 숨김없이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였다. 반면 내 발자국은 크고, 묵직하며 어딘가 비루해 보였다. 발을 감춘 가면 쓴 발자국이었다. '그러니, 고양이가 상전이고 내가 집사일 수밖에 없지.' 이런 사소한 것에도 차이가 드러나니 우스우면서도 허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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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정원에서 우리는 발자국을 심으며 산책했다. 나무 위에서는 까치가 지저귀고, 직박구리로 보이는 작은 텃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다녔다. 보리는 정원 담벼락 아래의 벤치 위로 올라섰다. 살짝 눈이 녹은 가장자리에 앉더니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야자수, 소나무, 수풀들이 뒤엉킨 그곳에 작은 천혜향 나무가 꿋꿋하게 서 있었다.


늦가을부터인가 짙은 녹색 열매 하나가 달려 있더니, 점점 색이 변해 이제는 완연한 오렌지색이 되었다. 그 밝은 빛은 휑한 겨울 정원에 잔잔한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혼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있는 작은 나무였다. 그 모습에서 고양이의 벌거벗은 발자국처럼, 묵묵히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조금 더 산책을 이어가니, 바람이 점점 매서워졌다. 천혜향 주위에 남긴 발자취를 뒤로 하고, 나는 큰 소리로 들어가자며 고양이들을 재촉했다. 눈보다 바람이 춥고 무서웠던지 녀석들은 고분고분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 정원에 고양이들과 함께 심은 발자국만 남겨둔 채, 나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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