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 필 무렵

제주도 시골 살기 19

by 새벽별

며칠 전부터 동네 어귀의 넓은 밭에서 유채꽃이 봄햇살처럼 환하게 피어있는 모습을 여러 번 마주쳤다.


'어, 유채꽃은 봄에 피는 꽃이 아니었나?'


꽃이 피어있는 이 시점에, 꽃은 봄이나 여름에 개화한다는 내 고정관념은 완전히 무너졌다. 불과 며칠 전, 3~4센티가 쌓일 정도로 '큰 눈'이 내렸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넓은 밭을 가득 메운 유채꽃을 보니, 1월 중순인 지금 벌써 봄이 찾아왔나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제주의 유채꽃은 1월에 피기 시작해서, 2월과 3월에 만개한 뒤 4월에 서서히 시든다고 한다. 3월에 피는 봄의 전령사, 개나리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셈이다. 유채꽃이 원래는 봄꽃이라는데, 제주 남쪽의 따뜻한 기후 덕분에 이른 시기에 개화하는 모양이다. 겨울에 피는 봄꽃이라니!


지난해 이 동네에 집을 구하러 왔을 때, 우리를 반겨주던 유채꽃을 보고 신기해하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가 1월이었으니 유채꽃이 필 무렵이었던 것이다. 제주에 온 지 벌써 1년이 흘렀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시간은 달리는 것조차 성에 안 차는지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겨울 한복판에 절정을 이루는 유채꽃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그 가냘픈 몸을 떨면서 끊임없이 꽃을 피운다. 이런 유채꽃에게서 추위를 견디는 인내와 포기하지 않는 따뜻한 희망을 배운다. '쾌활 명랑'이라는 꽃말을 굳지 말하지 않더라도, 유채꽃은 보기만 해도 그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유채꽃보다 겨울에 더 먼저 피어나는 꽃이 있으니, 12월에 개화하는 동백꽃이다. 이웃집 정원이나 동네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색의 탐스러운 꽃이다. 칙칙한 겨울배경 사이에 살짝 숨어있는 듯하다가도, '애타는 사랑'이라는 로맨틱한 꽃말에 걸맞게 붉게 물든 얼굴을 수줍게 내밀고 있다.


동백꽃은 하얀 눈을 맞으면서도 고운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오히려 더 진한 붉은빛으로 그 존재감을 확고히 드러낸다. 이는 또 다른 꽃말인 '열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동백꽃은 혹독한 환경에서도 삶의 열정을 놓지 않고 도리어 붉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제주의 겨울에 마주친 이 꽃들은, 척박한 땅에서 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꿋꿋하게 버텨온 제주 사람들과 닮아있음을 느낀다.




동네에 핀 유채꽃을 바라보며, 지난 1년 동안 지내온 제주 시골에서의 삶을 돌이켜 본다. 해외에 살면서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에 적응해야 했던 힘든 시절을 생각하면, 제주에서의 삶은 축복에 가깝다. 늘 자연을 동경하던 나에게 바다 가까이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은 지친 마음에 평화와 위로를 건네주었다. 이사와 정착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기도 했지만, 점차 느리게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다.


내년에 유채꽃이 필 무렵, 세상과 나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겨울에 피는 이 꽃들처럼, 세상에 대한 희망과 삶에 대한 변치 않는 열정을 품고 느리게 살아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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