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시골 살기 18
2024년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마당에 나갔던 고양이 보리가 다시 들어와, 아침을 준비하던 나를 불렀다. 가끔 혼자 놀기 싫거나 두려움을 느낄 때, 혹은 벌러덩 쇼를 보여 주고 싶거나 선물(?)을 잡아왔을 때, 보리는 거실로 들어와 나가자고 재촉한다.
"그래, 무슨 일인데? 엄마랑 가자."
고고한 자세로 앞장서는 보리를 따라 대충 코트를 걸치고, 살짝 열린 중문과 현관문을 밀치며 나갔다.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그런데 세상에, 밖에 눈이 오고 있었다! 거실 통창을 커튼으로 쳐 놓아서 눈이 오는지 미처 몰랐다. 굵고 탐스러운 함박눈은 아니었지만, 쌀알처럼 싸락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기다리던 첫눈이니 어찌나 반갑던지! 갑자기 김소운 시인의 위트 넘치는 시 <싸락눈>이 떠올랐다.
하느님께서
진지를 잡수시다
손이 시린지
덜
덜
덜
덜
자꾸만 밥알을 흘리십니다.
보리는 이전에 살던 집에서 눈을 보기만 했지, 직접 맞아본 경험이 없어 무서웠던 모양이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저게 뭔가?' 하는 눈빛으로 싸락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2층 테라스에서 보니, 세상은 땅에 살짝 덮인 눈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리 덕분에 찰나의 눈을 감상할 수 있어 고마웠다. 눈은 오래지 않아 그쳤고, 기온이 상승하자 금세 녹아버렸다.
눈을 바라보니, 10여 년 전에 캐나다에서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캐나다의 겨울은 폭설이 쏟아지고 기온도 꽤 떨어져 무척 추웠다.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세상은 아름다운 '눈의 왕국'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 왕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길정도로 눈은 어마어마하게 내렸다. 전기가 끊기기도 하고, 교통이 마비되며, 학교도 문을 닫았다.
그러나 눈이 그치면 아이들은 눈썰매를 타기 위해, 학교 옆 큰 언덕에 모여들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눈썰매장이었다. 내려갈 때는 재미있어도, 다시 타려면 힘겹게 언덕을 올라야 했다.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초등생 딸아이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웃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달콤한 즐거움을 얻으려면 그만큼의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그때 알았을까?
캐나다의 눈이 공포와 추억을 동시에 안겨주었다면, 한국 육지에서의 눈은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내린 첫눈을 보면 신기하고 좋았지만, 질퍽한 땅의 불편함이 먼저 떠오르곤 했다. 딸도 더 커서 그런지 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밖에 나가서 놀지도 않았다.
그러던 눈이 제주에 오니 귀한 손님이 되었다. 특히 내가 사는 남서쪽에서는 눈이 드물게 내린다. 육지에서는 폭설로 내린 첫눈으로 한바탕 난리였는데, 여기서는 좀처럼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다 첫눈을 맞았으니,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위의 김소운 시인처럼 많은 시인들은 '눈'을 소재로 시를 썼다. 특히 '첫눈'에 대해 쓴 시도 적지 않다. 그중 정호승 시인의 아름다운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를 옮겨본다.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중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첫눈 오는 날에 만나자고 약속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이 까마득하지만, 젊은 시절 나도 그랬다. 갑자기 내린 첫눈에, 시간이 맞지 않았던지 혹은 추운 날씨가 발목을 잡았던지, 결국 친구와의 약속은 흐지부지 사라졌다. 어쩌면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만으로도 이미 낭만적이고 가슴이 설레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주 시골에서의 첫눈은 누군가를 만나러 갈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은, 잠시 스치듯 지나간 싸락눈이었다. 첫눈 오기를 기다렸던 나는 시에서처럼 '첫눈 같은 세상'을 갈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온 셈이다. 그 '첫눈 같은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일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소음과 먼지로 더럽혀진 이 세상은 갈등과 상처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첫눈은 그 모든 것을 순백으로 조용히 감싸 안으며, 하얀 거품으로 세상의 오물을 씻어낸다. 마치 때가 묻지 않은 태초의 순수한 세계로 되돌리려는 듯이. 그런 곳이 '첫눈 같은 세상'일까?
요즘 우리나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 빠져 갈등이 심화되고, 그로 인한 불안정성으로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시기일수록 '첫눈 같은 세상'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모든 갈등과 상처가 녹아내리고, 설렘과 희망으로 다시 채워지는 '첫눈 같은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첫눈 오는 날에 꿈꿔본다. 비록 험난한 언덕을 다시 힘겹게 올라가야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