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독서 모임: '올해의 나'는

제주도 시골 살기 20

by 새벽별

흐린 하늘에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육지에는 눈이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는 읍내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오늘은 처음으로 독서 모임이 열리는 날이었다. 한 달 전, 모임장이 당근마켓에 날짜와 장소 그리고 토론할 책을 공지했다. 책은 근처 도서관에도 없고 독서 앱에도 없어 주문해 읽었다.


육지에 살 때도 2주에 한 번씩 다섯 명이 모여 독서 모임을 가졌다. 책 이야기뿐만 아니라, 모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었기에 일상과 교육 관련 정보도 자연스럽게 공유하였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오기 전 홍콩에서도 '북클럽'에 참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만의 작은 세계를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세계와 도킹할 때마다 나의 우주가 그만큼 확장되는 느낌이다. 그 추억을 되살리며, 이 시골에서 심심한 겨울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독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함께 읽은 책은 <올해의 미숙>이라는 장편 만화였다. 책 표지만 봤을 때 예쁘다고 생각했지, 만화책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만화책은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읽어 본 적이 없어 참 신선하게 느껴졌다. 첫 모임의 '얼음 깨기'에 딱 맞는 편안한 책을 골라준 모임장의 배려가 느껴졌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차로 10분 남짓 달려 카페에 도착한 후, 라테를 주문한 뒤 픽업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남성 한 분과 여성 세 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초면이었지만 반갑게 맞아준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모두 동의 하에 본명이 아닌 당근 아이디로 자기소개를 했다. 30대 초중반인 듯한 모임장만 빼고 모두 중년이었는데, 요즘은 이런 방식이 더 자연스러운가 보다.


참여자 중 제주 토박이는 없었다. 모두 외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고, 입도 기간으로는 내가 1년 차로 막내였다. 대부분은 2년, 한 분만 4년이 넘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깊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제주 생활에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는 듯 보였다.



<올해의 미숙>은 주인공 장미숙의 성장기를 그린 만화책이다. 80년대의 화려했던 순정만화에 비해 디테일이 적고 단순한 그림체지만, 인물의 표정과 감정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80년대생인 장미숙은 평범한 소녀지만, 이름 때문에 '미숙아'라 불리면서 왕따를 당한다.


이름은 정체성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불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미숙은 '미숙아'라는 놀림에 예민해졌고, 명찰을 달지 않고 등교하다 선배들에게 걸린다. 명찰을 일부러 집에 두고 나왔던 것은 아닐까? 이름이 주는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느껴진다.


미숙의 아버지가 데려와 키운 '진도'는 진돗개가 아니었다. 실망한 아버지는 강아지에 대한 관심을 끊는다. 독립 후, 미숙은 진도를 데려가 '절미'로 이름을 바꾸고 키운다. 잘못된 이름을 지우고 강아지에게 새 이름을 주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미숙의 성장 배경은 불우하다. 유명한 시인인 아버지는 가정에서는 폭력적이고 무책임하다. 학교에서는 전학 온 친구 재이 덕분에 버텼지만, 재이는 미숙의 환경을 글의 소재로 삼아 청소년 문학상에서 대상을 받는다. 이에 미숙은 큰 상처를 받고, 결국 학교를 자퇴한다.


미숙이 독립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집과 학교는 마치 인큐베이터 같은 공간이었다. 겉으로는 미숙을 보호해 주는 듯했지만, 실상은 그녀를 가두고 자유를 제한한 감옥 같은 곳이었다. 그 인큐베이터를 탈출한 미숙은 독립하여 비로소 성장하게 된다. 정작 그녀를 ‘미숙아’라고 부르던 사람들이야말로 인큐베이터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미숙아’였던 셈이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숙은 반려견 절미와 눈이 소복이 쌓인 숲길을 산책한다. 그 장면 위에는 책의 마지막 문장이 적혀 있다.


‘그동안의 일들이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


‘먼 과거'가 아닌 '먼 미래'라니. 어쩌면 미숙은 과거의 상처가 아득한 미래에도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지금 이 순간 ‘올해’라는 현재에 더 집중하고 싶었던 것일까? 타인이 불러준 이름을 거부하고, 느리지만 단단하게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미숙. 그래서 올해의 미숙에게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행복이 소중해 보인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책으로 시작된 독서 모임은 다음 책을 선정하며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제주에 내려와 '느리게 살겠다'라고 결심한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역설적이게도 바쁘게 지내온 나날들이었다.


음력설과 함께 또다시 시작된 새해, 문득 생각해 본다.


'올해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삶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미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올해의 나'는 지금 이곳에서 더 충실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느리지만 단단하게, 나만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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