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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Dec 21. 2022

[D+72] 뷔페의 딜레마

미국, 시애틀

워싱턴 주립대학이 눈에 들어온 건 순전히 시애틀의 경전철 Link의 종착역이 그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지하철이든 트램이든 아무 계획 없이 종점까지 가보는 걸 좋아하는데 워낙에 노선의 전체 거리가 짧다 보니 도심에서 겨우 한 두 정거장 떨어지고는 종점이란다. 그래도 미국의 대학들은 거의 마을 하나를 형성할 만큼 넓으니 산책하는 맛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출발을 했다. 


검색을 하다 보니 그곳의 도서관 중 하나가 해리포터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영화 속 세트와 비슷하게 생겨, '해리포터 도서관'이라 불린다 하여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도착한 시간이 하필이면 점심시간이라 학생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통에 한가로운 캠퍼스 산책 따윈 개나 줘버렸지만.


도서관 1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스타벅스도 학생들로 바글바글이다. 이 와중에 밥보다 공부가 더 중해요 를 외치며 도서관에 앉아있는 애들도 어찌나 많던지, 시골에서 한 30년 살다가 처음으로 서울에 와본 사람마냥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다. 


원체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오랜만에, 그것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을 보고 멀미가 난 것 같은데 한국 돌아가면 절에 들어가야 하나 고민 중.


학생들을 피해 다니다 보니 한가롭게 보이지만 결단코 아님. 심지어 한쪽에선 확성기로 시위 중


전생에 친구였을 청설모를 여기서도 만났다


호그와트를 닮긴 닮은 수잘로 도서관


수잘로 도서관 내부


학생들로 미어터지던 스타벅스




원래 계획은 오후엔 '시애틀 아트 뮤지엄'을 가려했었다. 일단 가긴 갔다. 


'Flash and blood'라고 이름 붙인 이탈리아 거장들의 특별 전시가 구미를 당겼으나, 학교에서 너무 진을 뺀 탓에 쉬어가는 의미로 뮤지엄샵을 먼저 들렀다. 아이고 대실망&대환장! 전시 퀄리티와는 아무 상관이 없긴 하지만 뮤지엄 굿즈나 기타 판매상품들이 내 취향과는 한참이나 벗어나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와 버렸다.


그리하여 뮤지엄에서 겨우 두 블록 떨어진, 대부분의 관광객이 시애틀에서 가장 먼저 들른다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을 드디어 방문했다.


지금껏 이곳이 내가 열렬히 사모해 마지않는 '마켓'임에도 방문을 미뤘던 이유는, 이번 금요일에 이곳 시장 음식들을 조금씩 맛보는 시식 투어를 신청해 놨기 때문이었다. 본의 아니게 여태 아껴뒀던 셈이지만 뭐 답사 왔다 생각하기로. 


그래서 식당 위주의 구경보다는 기념품과 소품, 특산물 가게들만 찾아다녔는데 그러다 영화, 게임, 만화 오타쿠들에겐 정줄 놓기 딱 좋은 가게를 발견했다. 멀더와 스컬리의 FBI 신분증을 보는 순간, 난 이 가게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금요일에 다시 찾아와 마구 덕질을 할 확률이 다분한 아주 위험한 가게.


오늘은 슬렁슬렁 답사만, 이라지만 또 혼자 신이 났지요


구경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나를 끌어내야 했다


슈퍼히어로들 틈에 당당히 서있는 밥 아저씨, 그래고 내 사랑 멀더




늦은 밤, 친구 J와 오랜만에 긴 수다를 떨었다. 서로의 일상을 묻고 서로의 건강을 챙기고 그러다 문득 이제 2주 후면 내가 인천 공항에 발을 디딘다는 걸 깨달았다. 세계일주 항공권, 다시 말해 스카이팀으로 묶인 항공사들 중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뉴질랜드로 들어가는 직항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경로가 바로 인천을 경유지로, 오클랜드에 들어가는 것. 


12시간가량 머물다 다시 떠날 테지만, 친구 J와 뉴질랜드 동행자인 H를 그날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두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니 분명 울면서 웃고 있을 거다.  


이 짧은 이벤트를 앞두고 나는, 여행의 처음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지금 그토록 원하던 여행을 하고 있음에도, 이 여행은 크게 즐기지 못하고 2주 후에 있을 친구들과의 만남에 더 가슴을 설레어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아주 아주 비싼 뷔페식당에서 값은 다 치렀는데 먹는덴 한계가 있고 이젠 랍스터도, 한우 투뿔도 지겨울 때. 사람들은 부러워 하지만 지금의 난 배가 터질 것 같은 그런 때. 방법은 잠시 배를 꺼뜨릴 잠깐의 시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인천에서의 스탑오버가 지금의 날 살리게 될 줄이야. 


내 방에 놀러 온 윈스턴. 밤마다 니콜라스와 나 사이에서 밀당 중인 놈


그림일기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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