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므스므 Dec 22. 2022

[D+73] 도전하니 보이는 것

미국, 시애틀

시애틀 공립 도서관 건물이 죽인다고들 했다.


그렇단 말이지 하며 찾은 그곳은, 시내를 방황하며 걸어 다닐 때마다 눈에 띄어 '얘, 뭐야?' 했던 건물이었다. 건물은 반듯해야 한다는 편견을 뒤집는 삐쭉빼쭉한 외관은 그렇다 쳐도 로비부터 시원시원하게 뚫린 개방감에 와, 공공건물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어 감탄을 했다.


시애틀 공립 도서관의 위용


1층부터 서가가 빼곡하길래 쭉 훑어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가장 접근하기 편한 위치에 미국 이민자들을 위한 직업 상담소가 설치되어 있고 그 뒤로는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이곳 시애틀에서 가장 많은 이민자들의 국가들인가?)의 책들이 꽂혀있었다. 


한국책들은 있어봤자 또 그 웃긴 70년대 부채춤과 한복 사진이 있는 가이드북이나 발견하겠지 싶었는데 웬걸. 출판된 지 10~20년이 넘은 책들이 대부분이라 언뜻 중고서점에 온 것 같았지만 2개의 책장 모두가 한국 출판사의 책들이었다.


여태 다녀본 도시의 서점이고 도서관이고 죄다 한국 관광공사는 뭘 하는가 싶게 한심했는데, 출판된 지 오래된 책들이라 해도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한국 책이 비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오후에 언더그라운드 투어나 갈까 했던 계획을 접어버리고 오랜만에 독서욕구가 뿜뿜 하여 한 자리 잡고 앉았다.


반갑고 고마웠던 한국 서적 코너


뻥 뚫린 로비의 개방감이 너무 좋았던


여행하다 예기치 못하게 올라온 독서 욕구


김영하 작가의 초기책들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었던 이 후로 '내 취향 아니심'하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알쓸신잡의 그 혀를 내두를 정도의 박학다식을 보면서 다시 찾아보게 되었고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그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는 바이블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굳이 찾지 않았을 그의 초기작들이 눈에 띄어 호기심에 몇 권 고르고 가볍게 읽을 책이라면 역시 요시모토 바나나지 하며 두 권, 한강의 책은 그냥 호기심. 그렇게, 널찍한 열람실 한편에서 점심도 건너뛰고 4시간가량을 앉아있다가 일어났다. 


한국에서라면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는다는 아주 흔하디 흔한 일상이, 여행지에선 이렇게 의외의 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처럼 여행 권태기에 빠진 사람에게 신선한 이벤트가 되어 주니 그걸로 만족한 하루. 


도서관을 나오며 유일하게 들고 왔던 책 <여행의 이유>를 기부했다. 나에게 이런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 준 도서관도 고맙고 이곳을 찾을 한국분들이 출판된 지 몇십 년 된 책만을 보는 게 안타깝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이 이곳에서 가장 최근에 출판된 한국 책이지 않을까.


절친 J의 생일과 동일한 페이지 번호 옆에 내 이니셜인 M을 코딱지만 하게 적어뒀다. 혹 시애틀을 방문하시거들랑 이곳에 들러 인증샷 좀 찍어다 주시게들.


사서 총각이 책과의 이별을 기념하라며 사진을 찍게 해 줬다

     



며칠 전 크리스틴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이번 목요일 저녁에 '콘트라 댄스' 모임이 있는데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었다. 평소의 나라면 '뭐라? 댄스라고라?'하며 몸서리를 쳤을 텐데 포틀랜드에서 그 정줄 놓은 포틀랜더들이 노는 걸 본 뒤로는, 나에게 찾아온 이런 기회들은 웬만하면 도전해 보자 싶어졌다. 여행 와 달라진 놀라운 마음가짐. 


그리하여 크리스틴의 남친인 잭의 차를 얻어 타고 시애틀 북쪽의 한 교회 강당을 빌려 열린, 원래는 영국에서 건너왔지만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시작되었다는 미국식 전통댄스 모임엘 참석했다지. 구경도 하고 사진이나 찍을 요량으로 간 건데, 가자마자 영상 속 저 한 무리의 춤바람(!) 난 아줌마 아저씨들 한복판에 글자 그대로 던져지고 말았다! 


노익장들이 대단하심


초빙(?)된 밴드의 연주실력이 수준급이다


산책하는 걸 제외하고는 몸으로 뭔가 하는 걸 (운동이라 부르지) 극혐 하는 인간이, 단체 군무의 특성상 흐름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그 안에서 이리 던져지고 저리 던져지다 결국 다리는 풀리고 머리는 뱅글뱅글 돌고 땀은 비 오듯 흐르니 별 수 있나. 기브업을 외치고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버렸다. 


에너자이저 배터리를 백만 개쯤 꽂은 저분들은 뭔가. 하나같이 춤에 너무 진심이고 너무 진지하고 너무 즐거워들 한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도 즐겁다. 공간 가득 넘치던 이 사람들의 에너지가 나에게도 전염되는 걸 느꼈다. 


잠깐 쉬기 위해 내 옆으로 온 잭에게, 나이도 한참 어린 내가 제일 먼저 포기를 하다니 부끄럽다 했다. 잭이 그런다. 사람들이 널 보고 웃는 건 비웃는 게 아니라 이제 우리가 네 친구라서 그래. 처음 만나는 누구라도 편견 없이 대하는 이런 마인드가 바로 미국이란 나라의 대체불가 장점이 아닐까. 내 안의 틀을 깼더니 어떤 경험들은 이렇게 몸으로 깨닫게 되기도 하는구나.  


그나저나 내일 아침에 근육통으로 꽤나 고생할 듯.


저녁 먹는데 겸상하자고 온 윈스턴


그림일기 #73


매거진의 이전글 [D+72] 뷔페의 딜레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