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마치고 내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지 한두 달여 만에 하늘길이 닫혀버렸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타격을 많이 입었을 호스트 친구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여러 군데의 숙소를 운영하던 야니와 플라우시나, 호스팅을 천직이라 믿던 까롤린과 코라, 에어비앤비로 생활비를 보태야 했던 다니엘 같은 친구들 말이다. 물론 내가 마지막 게스트가 되었던 브리깃타의 경우나 모시모시 때문에라도 게스트가 필요했던 질리언(출장도 전면 취소되었을 테니)은 큰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SNS 친구로 서로의 일상을 엿보는 호스트도 있고 숙박업을 아예 접었는지, 안부를 묻는 문자에 묵묵부답인 호스트도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들보다 고양이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노령묘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지만 대부분 외출 냥이들이다 보니 어떤 사고를 당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괴로워하며 떠올린 생각은, 고양이를 기르는 방식에 대해 어디까지가 '틀린 것'이고 어디까지가 '다른 것'인가 하는 경계의 기준이었다. 결국 그 기준에 따라 각자가 내린 선택이 과연 고양이를 위한 것인가, 아닌가...
한국의 고양이 집사들과 서양의 집사들은 서로 끝과 끝에 존재했다. 우리가 고양이가 아닌 이상 어떤 것이 고양이들을 위한 최선의 길인지 알 방법은 없다. 결국 집사들의 선택의 문제다.
틀림과 다름이란 단어 뒤에 늘상 따라붙던 이 '선택'이란 단어는 필연적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실까, 차를 마실까 고민할 때 내가 오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건 아닌지, 오후 업무를 빠릿빠릿하게 해내려면 카페인이 좀 필요한 건 아닌지 여러 가지 내 상황들이 떠오르게 된다.
커피를 선호한다고 해서 커피는 옳고 차는 틀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선택 속에는 이처럼 각자의 이유가 있고 상황이 있는 법이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상황에 따라 차를 마실 수도 있는 것처럼, 틀렸느냐 다르냐의 이분법만으로 선택의 이유를 단순화시킬 수 없는 법이다.
내가 만난 11명의 서양 집사들은 고양이들의 안전함보다 '자유로움'을 선택했다. 아마도 그들의 문화가, 생활방식의 근간이 이 단어에 뿌리 깊게 박혀있어서 일거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어떤 목표를 위해서라면 내 자유가 조금은 억압받아도 괜찮다고, 문화와 사회 전반에서 그렇게 교육받아온 한국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므로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다, 라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한몫을 했을 거다.
내 선택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 모든 고양이는 자유를 갈망한다, 라는 전제가 바닷물은 짜다 같은 명확한 진리일지라도 나는 내 고양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지 않다. 밖에서 차사고를 당할 수도, 나쁜 사람들에게 어떤 봉변을 당할 수도, 그래서 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고양이들의 본능, 자유를 들먹이는 것보다 내가 이 아이들을 잃고 살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이기적이래도 할 수 없다.
고양이들이 아파도 병원을 가지 않는 이유가 천수를 누리고 떠나는 게 자연의 섭리라서, 라면 난 그 생각에 싸울 거다. 나에게 온 이상,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살리고 보는 게 나만 바라보는 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내 최선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까지 버티다 결국 안락사시킨다면 그건 과연 자연의 섭리를 지킨 것인지 묻고 싶다.
내가 만난 이들 집사들의 선택에 대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이라고 이성적인 나는 얘기하지만 감성적인 나는 틀렸다고 말한다. 결국 반쯤 실패한 소통인가 보다.
그저 고양이들을 위한 내 선택에, 나 스스로 오롯이 책임지며 살 뿐이다.
내 인생도 그랬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