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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차 Aug 07. 2021

사라진다는 것

한 번은 당신과 걷다가 녹색 벌판을 지나온 적이 있다. 그날의 구름은 솜사탕처럼 피어났었고, 그날의 바람은 당신과 나를 어깨동무하는 친구처럼 귀를 간지럽히곤 했다. 


녹색 벌판을 파헤쳐나가며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내 손을 잡은 당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생긋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너무 좋아서 녹아내릴 것 같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사라지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 

사는 게 가끔은 너무 버겁기에, 너무나도 가혹한 형벌이기에, 우리는 주체가 되는 순간부터 비주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육체를 파괴하지 않고서 우리의 영혼만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회에서부터의 사라짐이다. 

우리를 비기호화하고 동물화하는 작업.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나 혼자서 마시는 커피나 혼자서 읽는 책.

이런 경우의 사라짐은 고독과 함께 동행하는 사라짐이다.


그러나 두 번째의 사라짐은 타인 안으로의 사라짐이다. 

타인 속으로 용해되어 스며들고픈,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녹아내리고픈 간절한 마음이다. '밖'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 '안'으로 사라지는 방식이다. 

내 몸 마디마디의 원자가 그대의 원자와 결합되어 하나의 완전체가 되는 기이하게 아름다운 꿈이다. 

그대와 하나가 됐으므로 나는 사라졌다. 이제 '나'는 부재하지만, '우리'는 존재한다. 


그래서 사랑의 사라짐은 어떻게 보면 시시포스적 실천이다. 육체가 가로막기 때문에 완벽하게 사라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 사라짐이라는 소실점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만지고 쓰다듬고 껴안고 애무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카뮈는 오히려 시시포스가 행복했을 거라고 결론 내린 것 같다. 도달하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이제는 도달하는 게 목표가 아니니까.  


                                                                                                                             (202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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