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mmm Jul 09. 2024

세계가 집이라면 가지안테프는 부엌

부엌에서 음식 대신 응급실로 가게 된 여행

카파도키아를 떠나 향한 곳은 우리나라의 전주와 같은 음식의 고향, 가지안테프였다. ‘세계가 집이라면 가지안테프는 부엌’이라고 할 정도로 튀르키예에서 다양한 음식의 천국이라고 한다.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미식의 도시이기도 한 곳이다. 미식가이자 요리 전문가인 엄마도 엄마를 닮아 세계의 음식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도 기대가 컸다.




미식 여행의 시작



다음 날 첫 식사로 간 곳은 1887년부터 현재까지 13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맘 차다스 레스토랑(İmam Çağdaş Kebap ve Baklava Salonu)이었다. 케밥뿐만 아니라 유명한 것이 바클라바로도 유명한 곳이다. 바클라바의 본고향인 가지안테프에서도 가장 맛있기로 소문난 바클라바를 판다고 한다.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배송을 위해 쌓아놓은 바클라바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왼편에는 온갖 종류의 바클라바가 전시되어 있고 직원 모두가 분주히 제조하고, 조각으로 잘라서 포장하거나 손님 테이블에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보다 이른 오전 시간이었는데도 현지인들로 가득 차서 활기가 넘쳤다. 몸살 기운이 있던 엄마는 아픔도 잠시 잊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식당 곳곳을 살펴보며 들떠 보였다.


엄마는 인도의 라씨 스무디처럼 강렬한 새콤함을 자랑하는 아이란을 무척 좋아한다. 아이란은 소화기능에 부스터를 달아주는 톡 쏘는 신맛이 특징이다. 중앙아시아에서도 카파도키아에서도 언제나 아이란을 마시던 엄마는 몸 컨디션 때문에 아이란을 마시지 못해 슬퍼했다. 또 다른 아이란 킬러인 이모가 행복해하며 마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구리제품으로도 유명한 도시라 얼음장처럼 차가운 은색 구리볼에 나온 아이란. 나는 지나치게 신 맛 때문에 아이란을 좋아하지 않는데, 여기서는 더운 여름날의 막걸리 한 잔처럼 구미가 당기는 비주얼로 나왔다. 정말 시원하고 맛나보여서 한 모금 마셨는데 역시나 아이셔와 맞먹는 시큼함을 감당하긴 힘들었다.


아이란에 이어 베트남 월남쌈처럼 싱그러운 채소와 샐러드가 나오고 라흐마준(Lahmacun)이라는 터키식 팬케익이 나왔다. 씬피자보다 훨씬 얇은 도우에 다진 고기와 채소를 얇게 펴서 바른 뒤 화덕에 구운 애피타이저다. 파슬리 같은 푸른 채소를 얹어 돌돌 말아 베어 먹으면 새콤한 소스맛과 싱싱한 채소, 그리고 바삭한 도우의 조합이 예술이다.


라흐마준(Lahmacun)


라흐마준에 심취해 있는 동안 메인 디쉬인 케밥도 금방 나왔다. 묽고 새하얀 요거트 소스와 함께 곁들이는 가지 케밥과 걸쭉한 요거트에 담긴 고기 케밥으로 가지안텝 음식 한 상이 차려졌다. 가지 케밥은 길고 통통한 가지를 4등분으로 잘라 그 사이를 다진 고기로 이어져있었다. 고온의 화덕에 익힌 가지라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씹기에 질긴 껍질을 벗겨내고 야들야들한 가지 속과 다진 고기를 한 입 크기로 썰어 먹으면 가지와 고기의 육즙과 풍미가 끝내줬다. 요거트 소스와 곁들이면 감칠맛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기도 하고, 조금 느끼할 것 같을 때 매운 고추를 한 입하면 느끼함이 싹 가셨다.


요거트에 퐁당 고기 케밥 & 가지 케밥


끝으로 바클라바를 종류별로 시켜 뜨거운 차와 함께 했다. 바삭한 페이스트리 아래 층층이 쌓인 꾸덕한 꿀과 피스타치오는 알쏭달쏭하게 꼬릿 한 맛이 있었다. 이 집 특유의 발효 과정에서 생긴 꼬릿 함인지는 모르지만, 코 뒤에 감도는 그 특유한 향이 왠지 모르게 정겨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한국인의 청국장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정취 같았달까.


이맘 차다스 레스토랑 바클라바




피스타치오 커피



오후에 찾은 카페는 피스타치오 커피로 유명한 곳이었다. 점심 식사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바클라바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커피와 함께 시켰다. 뜨거운 햇살이 고마운 겨울날, 테라스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며 커피와 바클라바를 기다렸다.


에스프레소 잔 크기의 은색 구리잔에 나온 커피는 마치 오토만 시대의 귀빈이 된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커피 가루를 뜨거운 물에 열심히 휘저어 내린 터키식 커피는 가루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 사이 오후 햇살이 닿아 영롱하게 빛나는 바클라바를 즐겼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스타치오 생산지인 가지안테프는 고급진 피스타치오 맛과 넘치는 생산량을 자랑한다고 한다. 우리에겐 귀하고 비싼 피스타치오가 이곳에선 정말 아낌이 없이 쓰이는 것을 보고 그들이 정말로 부러웠다. 바클라바에도 후하게 듬뿍 뿌린 피스타치오 가루는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커피 가루가 충분히 가라앉은 뒤 마신 피스타치오 커피는 씹히는 식감과 한 모금마다 폭발하는 고소함이 좋았다. 우리나라 미숫가루가 생각나는 터키식 곡물음료였다.


바클라바 & 피스타치오 커피




시작만 한 미식 여행



가지안텝에서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이곳에서 최대한 다양한 메뉴를 맛보는 것이었다. 우리의 미션은 시작도 제대로 못하고 끝이 났다.


도착한 날 저녁부터 엄마는 몸져누웠고, 오후 동안에는 겨우 힘을 내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엄마에 이어 2개월 넘게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던 아빠까지도 몸살 기운이 있었다. 이튿날부터는 남편과 나도 아팠다. 증상이 점점 안 좋아지더니 밤새 한숨도 못 잘 정도로 뒤척였다. 온몸이 부르르 떨렸고, 오한과 식은땀이 번갈아가며 우리를 괴롭혔다. 평상시엔 아파도 병원에 잘 안 가려는 남편이 병원에 가자고 말을 했다.


엄마 아빠도 함께 가실지 물었더니 다행히 아빠는 금세 회복 하셔 괜찮았고 엄마는 같이 가기로 했다. 이른 새벽, 우리는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응급실에 아무도 없어서 대기할 필요가 없었다. 적막함 속에 혈액 검사를 차례로 한 뒤, 침실에 누워 링거를 맞았다. 나는 비몽사몽 하면서도 잠이 들지 않아 곤히 자는 엄마와 남편을 바라봤다. 핼쑥하고 창백한 둘의 얼굴을 보며 여행 중의 모습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심지어 우리 셋 모두 태어나서 처음 맞는 링거였다. 인생의 또 다른 첫 경험을 머나먼 튀르키예에서 함께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피식 나왔다.


튀르키예에서의 응급실 링거


30분쯤 지나자 갑자기 사우나에 온 것처럼 온몸에서 열기가 느껴지더니 땀이 나기 시작했다. 링거의 힘이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링거액이 바닥을 보일수록 컨디션도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혈액 검사 결과를 가지고 온 의사 선생님은 나와 엄마는 독감이고, 남편은 바이러스에 걸린 것이라고 했다. 각자 처방전을 들고 나오는 길에 링거의 마법에 대해 찬양을 시작했다. 엄마는 천근만근이었던 몸이 가벼워졌다며 신나 했다. 남편도 병원에 안 오면 죽을 것 같아서 오자고 한 건데 오길 잘했다며 한결 나아진 것에 감사했다.


새벽까지 죽상이던 우리 셋은 여행 중에 응급실도 가고 별 일이 다 있네 하며 웃음을 되찾았다. 약국에서 각자 약을 한 봉지씩 받은 뒤,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병원 이후에도 바로 회복이 되지는 않아 가지안텝에 있는 내내 골골거리며 지냈다. 그 때문에 미식 여행은 예상치 못하게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즐기지를 못했다.




가지안테프의 수십 가지 음식을 튀르키예 응급실에서의 경험과 맞바꾸었다. 그때는 누워만 있다가 떠나기에 아쉬움이 너무 컸다.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있고 싶었지만 가야 할 곳이 있어 떠나야 했다.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카파도키아에는 열기구를 타러 꼭 다시 가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가지안테프는 못다 한 미식 여행을 하러 다시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 건진 것이 없지는 않다. 음식 얘기는 끝없이 못해도, 병원 간 얘기는 오래도록 할 테니 평생의 이야깃거리를 얻었다. :)

                    

이전 22화 열기구를 타기 위한 4박 5일의 기다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