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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m Apr 30. 2024

열흘 만에 사라진 원형 탈모

기적이 일어나는 곳, 아르슬란밥

엄마의 약속


새로운 목적지는 이름도 귀여운 아르슬란밥이라는 동네다. 키르기스스탄 여행을 여러 번 해본 엄마가 그랜드 투어 몇 개월 전에도 갔던 곳이다. 그때 당시 홈스테이 둘째 손녀가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어린아이가 얼굴 전체에 붉게 핀 알레르기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게 안타까워 도와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영상 통화하며 원격 진료를 하고 치료제를 찾아 아이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엄마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를 데리고 아르슬란밥으로 간 것이다.


구불구불 굽은 산을 지나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지나야 했다. 아이에게 전해 줄 약을 들고 가는 마음이 오프로드 여정을 더 신나게 만들었다. 마을의 메인 도로를 빠져나와 아래 개천을 따라 내려오니 숲길이 보였다. 곧이어 나타난 대문 뒤 붉고 노란 나뭇잎이 깔린 길 끝에 홈스테이가 있었다. 우리가 타고 간 봉고차 두 대가 들어가고도 남는 마당이 있는 집이다.


아르슬란밥 홈스테이


주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지난번 방문 때 만난 엄마, 아빠, 이모와 반가운 재회를 하고 처음 찾은 우리 다섯 명(동생 부부, 친구, 남편과 나)을 따뜻한 포옹으로 맞아줬다. 두 분의 눈에서 애정 어린 마음이 빛났다. 언제나 나에게 “내 첫사랑~”하며 반겨주시는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엄마와 홈스테이를 투어 하는 중에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가 나타나 엄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는 그 아이를 보더니 비명을 지르며 반갑게 인사했다. 조그만 몸집의 아이를 꼭 껴안더니 바로 그 아이의 얼굴을 살피는 걸 보고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저번 방문 때와는 다르게 피부가 호전되어 알레르기가 거의 사라진 듯해 보였다. 그걸 본 엄마의 깊은 안도와 기뻐하는 모습에 그 아이도 엄마를 지긋이 바라보며 엄마의 진심을 느끼는 게 보였다.


러시아어 공부를 열심히 한 엄마는 아는 단어들로 처방받아온 약에 대해 설명했다. 아이의 엄마도, 할머니도 경청하며 약봉지에 복용법을 열심히 적었다. 아픈 아이를 위한 엄마의 정성과 그 애정을 받는 감사한 마음이 넓은 마당을 가득 채웠다.


싱글 침대 4개가 있는 도미토리가 있어 아이들 다섯 명이 다 같이 자기로 했다. 한 명은 바닥에 자겠다고 했더니 할머니가 이불을 꺼내고 또 꺼내시더니 침대보다 푹신한 매트를 만들어 주었다. 해발 1500m의 찬 공기도 할머니가 깔아주신 매트 속에서 금세 녹아 따뜻하게 잠들 수 있었다.




호두나무 숲


아르슬란밥은 세계에서 가장 큰 호두나무 숲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방문했던 때가 마침 수확철인 9월이 며칠 지난 10월 초였다. 덕분에 우리는 호두 수확 체험을 갈 수 있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한 엄마의 음식을 싸들고 호두나무 숲으로 갔다. 우리 여덟 명 말고도 수확하러 온 사람이 열댓 명은 되었다. 5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아이들부터 중,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른까지 온 가족이 일손을 보태러 와있었다.


호두나무 숲



가을의 절정을 맞은 숲은 황금빛으로 변신 중이었다. 호두나무 가로수 사이엔 떨어진 호두가 가득했다. 하얀 포대부터 검정 비닐봉지 중 각자 하나씩 들고 땅에 떨어진 호두를 담으면 됐다. 나는 시장에서 파는 갈색의 딱딱한 열매가 나무에 달리는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두도 밤처럼 또 다른 외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옅은 초록색의 매실 같은 껍데기를 벗겨야지만 갈색의 호두를 만날 수 있다.


초록 껍질에서 나오는 즙은 손을 까맣게 만드는데 봉숭아 물처럼 며칠 동안 씻어 낼 수 없다. 높은 나무에서 떨어지며 이미 벗겨진 호두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손이 까매질까 싶어 처음에는 발로도 까보고 아예 벗겨져 있는 것들로만 주울까 고민 했었다. 하지만 거뭇하게 물든 어린 아이들의 손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한게 부끄러워졌다. 결국 망설임 없이 맨 손을 뻗어 줍기 시작했다.


호두 호두 호두 :)


줍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을 반복하다 보니 오랜만에 단순 노동의 매력을 느꼈다. 머리를 채우는 쩨쩨한 생각들은 사라지고 한 알 한 알씩 줍다 보니 소소한 성취감으로 채워졌다. 시원하게 부는 가을바람은 최고로 달달한 새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잔디에 두툼한 천을 깔고 할아버지네 가족과 우리 가족이 함께 앉았다. 엄마표 감자볶음, 불고기, 샐러드를 꺼내 상을 차리고 할아버지 딸이 직접 만든 쁠롭 (Plov; 볶음밥)이 화룡점정이 되어 성대한 소풍이 되었다. 끝으로 호두나무 숲에서 까먹은 호두는 최고로 달콤한 보상이었다.


호두나무 숲에서 즐긴 소풍




원형 탈모가 사라졌다고?


아르슬란밥에서는 매일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방 문을 열고 나오면 고요한 숲에서 새소리가 들려왔고 아직 찬 공기가 햇살에 데워지는 중이었다. 나는 1등으로 일어나 야외 마루에 앉았다. 은은한 숲 향에 취해 그랜드 투어 저널을 쓰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그렇게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면 한 명씩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방문을 나와 서로를 보고 씩 하고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9시 정각에 아침 식사가 차려졌다. 마당에서 딴 자두, 산에서 난 자연 꿀, 향긋한 차, 할머니의 전병과 며느리의 달걀 후라이로 채워진 자연과 정성의 향연이었다. 여덟 명이 모두 모여 아르슬란밥 시골 밥상을 즐겼다. 점심에는 엄마가 홈스테이 가족들에게 요리를 해주기 위해 주방에 들어갔다. 한국에서 공수해 온 재료로 준비한 첫 요리는 김밥이었다. 홈스테이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따라 할 수 있게 시범을 보였다.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김밥을 마는 막내 손녀와 능숙하게 잘하는 고등학생 친구도 즐거워했다.


아침 식사 & 김밥 마는 홈스테이 가족


이국적인 음식을 직접 해보고 맛보는 재미를 느끼는 걸 보니 더 해주고 싶어졌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시장에서 장을 보고 익숙지 않은 주방에서 여러 메뉴를 도전했다. 계량기도 없이 피자도우를 만들어 보고, 토마토 페이스트도 직접 만들어 피자를 했다. 남편은 월남쌈을 준비하고 파스타 가게를 운영하는 제부는 베스트 메뉴 3가지를 선보였다.


한 곳에서는 홈스테이 아이들도 동참해 피자 토핑을 올리고 월남쌈을 만들었다. 다른 코너에서는 미니 만두를 준비하는 며느리들과 함께 만두를 빚었다. 서로가 서로의 음식에 호기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 다양하게 협동하여 음식 준비를 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모르게 주방을 공유하며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월남쌈 & 파스타


식사 준비 사이엔 집 앞에 있는 냇가에 가서 발을 담그고, 숲길을 산책하며 보냈다. 학교 다녀온 아이들과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아이들 학교에서 축구를 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후를 즐겼다. 아침 7시에 하루를 시작해도 시간이 모자랄 만큼 아르슬란밥에서는 매일매일이 바빴다. 그리고 시간이 가는 게 너무 아까웠다.


여기에 있는 동안 바쁘고 촘촘한 서울에 살면서 놓친 여유를 찾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들었다. 빙하수가 흐르는 물에 발 오래 담그기 게임에 목숨을 걸었고, 냇가에서 이쁜 돌 찾기에 눈이 빠질 뻔했다. 그네를 타고 하늘을 보며 몽롱한 기분을 즐겼고 눈싸움이나 닭싸움 같이 유치한 놀이에 자지러졌다.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순간순간에 감탄하며 매일을 보냈다.


그네 타기에 진심을 담아


마지막 날 아침 동생과 친구와 산책을 나갔다. 셋이 숲길을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모두 아르슬란밥의 매력에 대해 끊임없이 말했다. 걱정을 내려놓게 되는 자연의 힘, 나이를 잊게끔 가벼워진 마음,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심정.


그 중,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말이 있다. 친구의 원형 탈모가 사라졌다는 소식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스트레스로 나타난 탈모가 여행 시작한지 열흘만에 사라진 것이었다.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의아했고 거짓말 같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가 느낀 아르슬란밥의 매력을 몸도 느꼈던 것이다. 마음이 가볍고 들 뜨는 곳이 아르슬란밥이니까. 여긴 어떤 아픔도 하루만에도 낫게 해줄만한 곳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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