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남녀의 역할 차이가 크지 않고 여성을 신성시하여 우대했던 상나라는 여성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후대와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 시대 고위 여성들에게 ‘마마님이나 마님’을 붙이는 것이 최고의 존칭이었듯, 당시에는 ‘부인 부(婦)’ 자가 최고의 존칭어였다. 더불어 신성함과 존엄함을 표시하고자 하는 대상에 ‘여자 여(女)’를 덧붙였다. … 후대에 시끄럽다[奻], 간사하다[姦], 노예[奴], 시샘하다[妎, 妬], 투기하다[妒], 방해하다[妨], 헐뜯다[姍] 등 온갖 안 좋은 개념에 여(女) 자를 붙이던 습관과는 정반대인 것이 재밌다.
<표류사회> "남녀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고대 여성들의 삶" 중
신라인들은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여성에게도 주체적인 성 결정권이 있었다. 조선식 유교 관념에 익숙한 우리는 아직도 성(性)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매우 남성 중심적이다. 때문에 성을 즐기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하지만 신라의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당당하고 자유롭게 성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남녀가 똑같이 스스로의 성 문제를 결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신라는 일부일처제와 처첩의 구분이 있었음에도 ‘색공’(色供)과 ‘마복자’(摩腹子)라는 독특한 풍습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