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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Nov 13. 2021

한국 여성사와 가족문화사를 정리한 책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한국의 여성사와 가족문화의 변천사를 다룬 책이 나왔다.

바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이다.


이제까지의 한국 여성사 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시대가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두께도 상당하다. 약 540쪽)


특이한 점이라면 고조선과 함께 같은 동이족 국가로 알려진 상나라(은나라)도 함께 다룬다는 점이다. 상나라의 유민이 기자조선의 주류가 된 것, 신라와의 혈통 및 문화적 연관성 등, 현재까지도 우리 문화에 많은 자취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상나라 여성들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상나라 왕후 부호의 상, 손에 통수권을 상징하는 도끼를 들고 있다.(중국 은허박물관)

상나라의 남녀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남녀에 대한 큰 차이가 없어서 상나라 여성들은 신료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고, 경제활동을 하거나, 전쟁터에 나가기도 했다.

상나라 왕후인 '부호'의 묘에서는 군권을 상징하는 도끼나 제사장의 권한을 상징하는 솥 등이 쏟아져 나왔는데, 함께 나온 갑골문에 의하면 그녀는 전쟁터에 나가 군사를 지휘하고, 외교관이 되어 타국에 방문하며, 당시에는 가장 신성한 행위였던 천제를 지내기도 했다. 갑골문에서 부에 대한 묘사는 남성 지도자라고 착각할 만큼 남녀의 차이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남녀의 역할 차이가 크지 않고 여성을 신성시하여 우대했던 상나라는 여성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후대와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 시대 고위 여성들에게 ‘마마님이나 마님’을 붙이는 것이 최고의 존칭이었듯, 당시에는 ‘부인 부(婦)’ 자가 최고의 존칭어였다. 더불어 신성함과 존엄함을 표시하고자 하는 대상에 ‘여자 여(女)’를 덧붙였다. … 후대에 시끄럽다[奻], 간사하다[姦], 노예[奴], 시샘하다[妎, 妬], 투기하다[妒], 방해하다[妨], 헐뜯다[姍] 등 온갖 안 좋은 개념에 여(女) 자를 붙이던 습관과는 정반대인 것이 재밌다.

<표류사회> "남녀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고대 여성들의 삶" 중


이처럼 처음부터 문화충격으로 시작하는 이 책에는 우리가 처음 보는 역사 속 비하인드스토리들이 쏟아진다. 남성 사관들의 손에 의해 제대로 적혀지지 못했던 숨은 이야기들이 사료의 구석구석에서 파헤치고, 파내어졌다.


예를 들자면,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만들어지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살펴보면서 모계사회 시스템의 몰락을 주도한 역사적 큰 사건과 이후 여성에 대한 탓을 통해 어떻게 부계사회로 전이돼 갔는지 그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또 고대에는 모계로 전해지던 성씨 문화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부계 성씨 문화로 바뀌게 되었는지, 또 그것이 신라에서 어떻게 모계혈통을 중시하는 사고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고대라고 생각하는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등에는 위인의 계통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로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를 연 시조들의 어머니는 알아도 아버지는 신, 자연, 정령 등으로만 묘사된다. 모계를 중시하는 풍속과 어머니를  중심으로 모여살며 약탈혼과 비슷한 장가가기 문화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여의 해모수는 유화가 주몽을 임신했어도 자기 세계로 돌아갔고, 주몽 역시 졸본의 예씨가 유리왕을 임신했지만 자신의 나라로 떠나 버렸다. 실제로 삼국에는 시조모를 국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지만, 시조의 아버지를 제사지낸 예는 드물다. (아버지가 신 등으로 묘사되어 구체적인 존재를 확인하기 어렵다)


신라엔 미실처럼 강한 여성이 많았다

드라마 <선덕여왕> 중 미실이 자신만의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


신라인들은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여성에게도 주체적인 성 결정권이 있었다. 조선식 유교 관념에 익숙한 우리는 아직도 성(性)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매우 남성 중심적이다. 때문에 성을 즐기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하지만 신라의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당당하고 자유롭게 성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남녀가 똑같이 스스로의 성 문제를 결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신라는 일부일처제와 처첩의 구분이 있었음에도 ‘색공’(色供)과 ‘마복자’(摩腹子)라는 독특한 풍습이 만들어졌다.




놀라운 사실은, 신라의 왕후는 왕이 마음에 안들면 이혼장을 던지거나 궁을 나가버리기도 했다는 점이다. 만약 왕후에게 큰 잘못이 없었다면 왕은 위자료를 지급해야 했다. 실제로 진흥왕의 왕후였던 숙명공주는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출궁해 원광대사를 낳았다. 법흥왕의 후궁이었던 준실부인은 왕이 다른 후궁만 찾자 궁을 나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다. 경덕왕의 왕후 삼모부인은 스스로 궁을 나갔지만, '사량부인'이란 높은 지위를 유지하며 막대한 부를 모았다. 그 덕에 경덕왕이 큰 종을 짓고 싶어도 돈이 부족해 완성이 어려워지자 사량부인이 크게 시주하여 완성을 도왔다. 그 종이 아직까지 실존했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컸을 황룡사 대종이다.


그리고 여성들도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힘을 과시했는데, 권세가 강하면 남첩을 두거나 개인적인 사신들을 거느리기도 했다. 또 시장의 경제활동은 거의 여성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개중에는 일본과의 무역으로 큰 돈을 버는 여성도 있었다.




길어서 신라시대까지만 정리합니다.

뒷 부분은 2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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