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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진품 명화전을 보고 나서...

삶의 고통속에서 피어나는 인류애

by 호수공원

자신의 귀를 자른 미치광이 화가! 괴팍하고 폭력적으로 거친 성격일 것 같은, 생전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진한 어둠 속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사람들은 왜 아직까지 그에게 열광하는 걸까?


고흐.png <빈센트 반 고흐 1853년~1870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이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는 버스를 탔다.

대한민국 지역 최초로 개최되는 반 고흐 진품 명화 회고전을 보러 시립 미술관으로 향한다.

이번 주가 마지막이라 어쩌면 이번 생애 그의 작품을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마음에

끊기려는 막차를 타고 가는 듯 약간의 조바심과 절박함을 뒤로한 채, 버스에서 내렸다.

시립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곧 정리하고 문을 닫게 될 어느 빵집을 보았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 빵집 문을 열었다. 빵집에선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고, 나는 기분 좋게 따라 불렀다. 단팥빵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에 빵을 올려놓았다.

40대 중반 내 또래로 보이는 사장님도 나와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노래 알아요?”

“네. 이 노래 좋아해요. 아스피린!”

사장님은 더욱 신이 난 듯 활짝 웃으며 계산을 해 주었다. 가게 사정을 뒤로한 채 활짝 웃는 그를 보며, 나 또한 미소를 머금고 밖으로 나왔다.


미술관에 도착하였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평소에 못 보던 고흐의 작품들이 전시된다고 하니 궁금한 마음 한가득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1887년 여름, 고흐가 남긴 말 중에서...-


1881년 9월 네덜란드 시기는 고흐가 화가가 되기 위한 입문과정이다. 반고흐의 입문 초기 작품은 인물화들이 다수를 이룬다. 이는 반 고흐의 영혼 깊숙이 자리한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며, 진실된 모습을 그려 내는 것이 화가의 길이라고 스스로 믿었기 때문이다.

-반 고흐 진품 명화 회고전 팸플릿에서 발췌-


고흐의 처음 작품에는 고독한 모습에 어두운 인물들의 모습이 암실을 연상케 했다. 차분하고 무거운 공기가 맴돌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숨결의 공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되지 않고 오롯이 그 공간에서 나 혼자 느끼고 싶을 만큼 아늑한 마음이 들었다.


고흐 인물화.png <바구니에 앉아 애도하는 여인/ 1883년 작품>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 1882년 작품>


예술이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가

본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허무하지도

생각에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1878년 11월 15일, 고흐가 남긴 말 중에서...-


1886년 3월 초부터 2년간의 파리에서의 생활은 반 고흐가 자신의 화풍을 정립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결정적인 시기이다. 남프랑스의 뜨거운 태양 아래 모든 정열과 열정을 쏟아부으면서 더 눈부시고 불꽃보다 강렬한 색채 회화로 그의 화가 인생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일곱 점에 달하는 해바라기 작품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반 고흐 진품 명화 회고전 팸플릿에서 발췌-


이제, 그의 작품에도 빛이 난다. 아름다운 풍경이 포근한 봄 같아 살아 있는 꽃은 생동감과 신선함을 준다.

고흐 정물화.png <식당내부 / 1887년도 작품> <장미와 모란 / 1886년 작품>


생레미에서의 일 년은 자연의 빛과 형태를 자신만에 독특한 표현 양식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회화를 통한 구원의 길로 접어든 시기이다. 생래미 정신병원에 머무르면서 정신적 고통을 작업에 대한 의지로 이겨내면서 응어리진 현실의 고통을 더 깊고 강하게 표현되었다.

-반 고흐 진품 명화 회고전 팸플릿에서 발췌-


고흐는 고갱과 같이 살면서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성격 차이로 서로 사이가 나빠지게 되고, 고갱은 고흐를 조롱하는 듯한 치졸한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고갱과의 다툼으로 정신적인 병까지 더해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

그 이후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정신적 질환으로 인한 고통을 떠올려 그림 속의 소용돌이가 생겨났고, 그 무렵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을 남겼다.


image02.png <별이 빛나는 밤 / 1889년 작품>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라는 인물을 생각했을 때 괴팍하고 무척이나 거친 사람이라 여겼는데, 그가 남긴 초기 작품들 속에 인물화와 여러 작품을 보면서 따스한 인간미가 느껴졌다.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

사람들을 사랑하며 때론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하며 예술로 승화시킨 그는 천상 예술인이었다.


1890년 5월 오베르에서 가셰의 보호 아래 그림 그의 전부였다. 그의 현실은 비록 어두웠지만 그의 그림은 어둠을 뚫고 찬란한 빛의 색채로 장식되어 불꽃같은 10년의 세월을 통해 못다 한 인류애와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세상에 되새겨주고 있다.

-반 고흐 진품 명화 회고전 팸플릿에서 발췌-


고흐는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 있는 그 자체다.’라는 말을 남기고 십 년 동안 그림을 그리다 37살에 화가로써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비록 짧지만 누구 보다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고흐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1874년, 고흐는 화랑에서 일하다가 하숙집 딸을 짝사랑하여 고백했지만 그녀에겐 비밀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고흐는 큰 충격을 받고 방황한다.

1881년, 고흐는 미망인이 된 사촌 여동생에게 사랑을 느껴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1883년, 고흐는 임신한 거리의 여자와 동거를 하지만 집안 반대가 심하여 헤어진다.

고흐가 보다 일반적인 여자와 사랑을 이루어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았다면 그는 어떤 작품을 남겼을까?

그의 짧은 생애가 안타깝게 느껴진다.




♪어른이 된다는 그 상상만으로도 내겐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고통일 거야♬

미술관에 오기 전 잠깐 들른 빵집에서 들었던 펑키한 리듬의 노래 가사가 고흐가 마지막 남긴 말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살아 있는 자체가 끔찍한 고통일까? 그 고통 속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곁에 있는 사람들 때문일까? 고흐도 그렇게 끊임없이 사람들을 사랑했고 작품에 남긴 것일까?


고단한 삶을 마치고 감자를 먹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그려준 고흐!

그가 작품으로 전한 진심의 인류애가 현재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을 열광시킨 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는 오후, 나는 우산을 펴고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image03.png <감자 먹는 사람들 / 1885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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