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가을
몹시도 더운 여름이었죠. 내 몸을 걸치고 있던 옷가지들이 축축하게 젖을 만큼요.
어스름 저녁이 오기 전, 아이들 하원을 위해 집 밖을 나섰어요. 집에서 버스 한 정거장 거리를 터벅터벅 걸으며 어린이집 버스가 오는 그곳에서 아이들을 기다렸죠.
어린이집 버스가 내 앞에 멈춰 섰고, 아이들은 더위에 지쳤는지 잠이 덜 깬 듯 나를 보네요.
아이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고 큰 딸을 태권도 학원에 바래다주었어요.
동네에서 유명한 태권도 학원. 작년에 어린이집에서 친한 친구에게 가장 아끼는 물건을 빼앗기고도 단 한 마디도 못 하는, 흉흉한 사회에 악당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감함을 심어주기 위해 딸을 위한 선택이었어요.
작은 아들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조그마한 손의 올려주고 집에 가기 위해 또 버스 한 정거장의 거리를 걸었어요. 푹푹 찌는 더운 날씨에, 5살 아들의 작은 보폭으로 종종거리며 같이 걷는 걸음은 정말이지 힘에 겨웠어요. 어떤 날은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아들은 떼와 고집을 부리며 집에 안 가겠다고 한 발짝의 걸음도 떼지 않을 때도 있었죠. 그런 날은 정말인지 하루가 고된 날이었어요.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며 바위처럼 커다란 구름이 땅에 뚝 떨어질 것 같은 날, 그날도 어김없이 아들과 함께 길을 걸었죠. 집에 다다르자 잠시 쉬어가라고 잔잔한 바람결이 선선하게 불어 주고 있었어요.
그런 바람을 맞으며 아들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왜! 호호 소리를 안 내는 거야? 호호 소리를 내야지!”
저는 아들에게 누구한테 말하는 거냐고 물었죠.
“엄마! 바람이 호호 소리를 안 내고 있어. 바람도 많이 힘든가 봐.”
우리는 바람을 휙휙 분다고 하죠. 아들한테 바람은 호호 소리를 내는, 소리도 없이 부는 바람이 힘들까 봐
걱정하는 아들의 그 마음에 피로가 씻기듯 청량함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지속되는 더위와 가끔 내리는 비도 반갑지 않던 그런 날, 나는 기운 없이 젖은 옷을 걸치고 삶에 절여진 듯
창가에 기대어 잠이 들었어요.
반쯤 열린 창틈 사이로 풀벌레들이 재잘거리듯 합창하는 소리에 잠이 깼어요.
잠깐의 쪽잠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들면서 상쾌했어요.
풀벌레들의 자그마한 날갯짓은 투명한 바람이 되어 이마의 이슬처럼 맺힌 땀을 식혀 주고, 내 코끝을 살짝 간지럽혀요.
문득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창가를 바라보았어요. 까만 밤, 인적이 드문 거리에 가로등만 홀로 서 있네요.
어느샌가 어여쁜 풀벌레 한 마리가 내 귓가에 다가와
“끝이 없는 어두운 터널의 깜깜한 너의 삶 속에서... 곧 가을이 다가올 거야.
나뭇가지 끝에 간신히 걸린 낙엽들이 가을 바람결에 우수수 떨어지듯 너의 힘겨운 삶의 조각들도
그 순간만큼은 사라 질 거야.”
막연함과 더 나아질 것이 없는 듯한 삶 속에서 깊은 한숨과 옅은 미소가 서서히 번지는 순간.
나는 덜 마른 옷가지들을 벗어던져 시원한 물줄기에 나를 맡겼어요.
시원함의 쾌감이 온몸에 퍼지면서 나를 감싸주네요.
나는 뽀송하고 산뜻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어요. 살갗에 닿는 그 포근한 느낌이 참 좋아요.
아침, 저녁이면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더위도 이제는 잠잠해졌습니다.
이른 저녁 훈훈한 바람이 나를 감싸고 있을 때,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껴요.
이제 하늘을 가득 채웠던 구름도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물러나겠죠?
실구름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의 하늘이 드리우는
청명한 가을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내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