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이 아니라 정착지였다

자연도 사람도 푸르렀던 엘라

by 은손


다음 여행지는 엘라로

Lonely Planet

오늘은 엘라로 떠나는 날이다. 12박 13일이다 보니, 도시 두세 곳쯤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고민 끝에 고른 곳은 엘라.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엘라에 가는 노선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해요." — 챗지피티의 한 마디에 마음을 정했을 뿐이다.


달리는 노래방
엘라 행 기차

기차 출발 시간은 5시 30분. 간신히 맞춰 도착한 순간,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3등석 쪽에서 노래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최신 가요였을까, 스리랑카 국민 애창곡이었을까. 확실한 건, 모두가 신이 나 보였다는 것. 반주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궁금해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어떤 아저씨가 노래방 기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유럽인 여행자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껴도 돼요?" 신청곡은 호텔 캘리포니아.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그리곤 다 같이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여행자들의 감성 충만한 곡조에 현지인들의 춤까지, 열차는 순식간에 축제의 장이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선명하게, 가장 오래 기억될 순간이었다.


움직이는 수채화
엘라 행 기차

기차는 마치 움직이는 수채화 같았다. 나보다 키 작은 나무와 3미터는 넘는 나무가 나란히 어우러질 줄이야. 저마다 엘라의 평화로움을 그려내고 있었다.


초록색 카펫처럼 끝없이 펼쳐진 홍차밭에는 찻잎을 따는 여인들이 간간이 보였다.


어떤 역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마음이 뻥 뚫렸다.



엘라는 정류장이라고?

갑자기 외국인 여행객이 우르르 탔다. 내 옆자리에도 누군가 앉았다. 그녀는 엘라에서 하루만 쉬고, 다른 마을로 떠날 예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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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 그건 밥 먹고 잠만 자는 거자나?"

“맞아. 넌 며칠 묵을 건데?"

“6박 7일."

“응?

엘라처럼 작은 마을에서 뭐 하고 놀게?

거긴 정류소처럼 쉬었다 가는 동네로 유명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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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소처럼 쉬었다 가는 곳' — 이 별명은 처음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나는 매력도 없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셈이다. 괜히 불안했다. 앞자리 뒷자리 사람에게도 엘라에 얼마나 머무는지 묻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길어야 이틀이었다. 망했다.


ChatGPT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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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차라리 내 결정을 믿는 게 낫겠다. 갑자기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처럼 게으름 많은 여행자는 바람만 쐬어도 7일이 부족할 수도 있다. 정 할 게 없다면, 중간에 올라오면 그만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잃을 건 없었다. 일단 가보자고.



엘라의 매력은 내가 찾아볼게


드디어 역에 도착했다. 수십, 수백 명이 기차에서 쏟아져 나왔다. 툭툭 기사들은 기차역 앞에서 부지런히 호객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내려갔다. 이 마을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목적지 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시간 — 여행지에서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메인 스트리트에는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식당, 여행사, 옷가게, 마사지 숍, 요가원, 편의점 — 이 정도면 장기 체류도 할 수 있겠는걸. 그런데 5분 만에 산책이 끝났다. 이렇게 짧다면, 정류장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다. 이 마을의 매력을 꼭 찾아내고 싶었다. 찻길을 따라서 걸으니, 으리으리한 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등성을 따라서 수십 채의 집과 호텔이 모여 있었다. 혹시 엘라의 매력은 이 그림 같은 풍경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엘라 한복판에서 캠핑을


이제 에어비앤비에 가야겠다. 내가 예약한 에어비앤비는 도심 속 텐트였다. 텐트를 열고, 테라스에서 햇살을 감상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공용 식당에서 다른 게스트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면서도 연결을 지향하는 숙소 — 시골 여행에서는 이런 에어비앤비가 끌린다. 게다가 메인 스트리트에서 가깝단다. 후기가 아예 없었지만,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했다. 드디어 실물을 볼 수 있겠구나.


분명히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 구글맵을 따라서 이 골목 저 골목 열심히 돌아봤지만, 텐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SOS 채팅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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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3분 뒤, 내가 서 있었던 편의점 앞에 누군가 다가왔다. 청바지에 단정한 셔츠를 입은 30대 초반의 남자, 그의 이름은 수미스다. 손님의 상황을 조심스레 살피면서도, 꼭 필요한 말만 건넸다. 본인이 생각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것 같았다. 책임은 다하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센스. 직업 정신이 엿보였다.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기차역 앞에서 기다렸는데, 서로 찾지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툭툭을 타고 숙소까지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미스는 내 캐리어를 챙겼고, 숙소 앞에서는 여자 스태프가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머리카락 한 올도 젖지 않은 채, 방에 도착했다.


숙소는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테라스 밖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솟아 있었다. 그 가지 사이로 다람쥐 한 마리가 놀고 있었고, 까마귀도 가까이 날아들었다. 바로 옆에는 홍차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산속에 머무는 기분.


방에는 웰커밍 실론티 세트가 준비돼 있었다.


ChatGPT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왓츠앱 보내주세요."

유창한 영어에 따뜻한 배려가 묻어나는 인사.

아무리 생각해도 호텔 한 번 잘 골랐다.



오래 머물기를 잘했어

다음날 아침,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었다.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나 보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텐트 지퍼를 활짝 열었다. 누군가 이른 아침에 커튼도 정리하고, 테라스에 식탁도 세팅한 모양이었다. 부탁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이 에어비앤비는 널리 알려져야 한다.


그런데 식탁에 머그잔 세트만 보였다. 혹시 아침이 커피는 아니겠지. 살짝 실망하려던 찰나, 접시가 계속 들어왔다. 갓 구워낸 빵, 오믈렛, 과일까지. 이 정도면 5성급 호텔도 부럽지 않았다. 햇살을 받으며,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즐겼다. 매일 이렇게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일은 과일을 더 많이 먹고 싶다고 말했더니, 스태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의 모든 순간이

나만의 속도, 입맛, 기분에 맞춰서

흘러가고 있었다.


온종일 마을을 걸었다. 옷가지도 사고, 근처에서 요가 수업도 들었다. 땀범벅이 된 채, 숲 속 카페에서 생과일 주스를 마셨다. 현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내 안에도 활기가 차는 듯했다.



결국 사람이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찰나, 호텔 스태프의 문자를 받았다 — "집에 들어올 때 연락해. 어두워서 위험할 수도 있거든. 데리러 나갈게." 이제야 알겠다. 엘라의 진짜 매력은 결국 사람이었다. 6박 7일 예약하길 잘했다. 사람이 선한 곳은 오래 머물러야 진가를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의 하루하루가 더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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