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서도 원칙과 유연함이 모두 필요하다.
4월이 되었지만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새싹이 감추어져 있고, 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역시 캐나다의 겨울은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라는 말이 맞는것 같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더 길고 춥게 느껴진다. 눈도 역대급으로 많이 내렸다.
도시마다 봄이 찾아오는 시기가 다르다. 그래서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일정이 다른것 같다. 일정이 겹치면 엘리트 선수들이 동시에 출전할 수 없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고, 도시마다 날씨가 달라서 마라톤 대회를 열기에 적정한 시기가 다른것 같다. 국제 마라톤 대회의 일정을 비교해 보면 그 도시의 날씨를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2025년 국제 마라톤 대회 일정
도쿄 마라톤: 3월 2일
서울 마라톤: 3월 16일
보스턴 마라톤: 4월 21일
런던 마라톤: 4월 27일
토론토 마라톤: 5월 4일
베를린 마라톤: 9월 21일
시카고 마라톤: 10월 12일
뉴욕 마라톤: 11월 2일
마라톤은 야외에서 하는 스포츠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밖에서 달린다. 수영 다음으로 복장이 가벼운 스포츠이다. 엘리트 선수들의 경우 최소 2시간, 일반인들은 3시간 혹은 4시간 이상을 일정한 속도로 달려야 하기 때문에 옷을 두툼하게 입으면 효율이 떨어진다. 마라톤 선수들이 입는 옷을 보면, 주로 상의는 런닝셔츠처럼 생긴 싱글렛이고 하의는 짧은 반바지 혹은 쫄바지를 입는다. 달리면 몸에서 열이 나지만 추운 날씨에 이렇게 입고 출발선에서 기다리다가 달리면 몸에 탈이 날 수 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봄과 가을에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토론토 마라톤이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열린다는 것은, 누가봐도 토론토의 4월은 아직 봄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4월이 되면, T. S. Eliot가 쓴 시 The Waste Land(황무지)의 시작 문구가 떠오른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이 피어나고,
추억과 열망이 혼재하고, 잠든 뿌리를 봄비가 휘감는다.
캐나다에서는 4월이 아직 겨울이지만, 한국이나 미국에서 4월은 봄이다. 새싹이 돋아나고 봄꽃이 피어나는 4월을 Eliot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다. 추운 겨울에는 날씨의 영향으로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지만 봄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이제는 현실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 계절이 바뀌어서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지는게 없을 때 더 큰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것 같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커진다.
캐나다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12월부터 3월까지 다른 나라들도 춥다. 그러다 4월이 되면, 이제는 봄의 문턱에 들어서며 겨울옷을 정리하고 봄을 맞이한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며칠 잠깐 따뜻해진 날씨에 속아서 겨울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실망을 하게 된다. 겨울이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지난주 후반에 봄날씨처럼 하늘도 맑고 날씨가 따뜻했다. 하지만 어제는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저녁을 일찍 먹고 6시 즈음에 창밖을 보니 눈과 강한 바람이 섞여서 휘날렸다. 가족들과 함께 달리기 훈련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다섯 식구가 다같이 달리기를 하러 나간다고 약속을 했지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둘째 딸이 어떻게 할것인지 아빠에게 물어봤다.
"아빠! 날씨가 이런데 오늘도 갈거야?"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한시간 안에 눈이 그친다고 나왔다. 어지간하면 가족들과 같이 나가서 달리고 싶었던 아빠는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7시 즈음이 되었을 때, 창밖을 보니 눈이 그쳤다. 하늘도 이정도면 맑았다. 아빠는 각자의 방에 있는 가족들을 부르면서 말했다.
"달리기 하러 가자!! 눈이 그쳤어!!! 5분 후에 출발할거야~"
날씨를 확인해보니 기온이 영상 2도이고, 바람이 조금 불어서 체감온도는 영하 9도였다. 지금까지 월요일마다 비슷한 날씨였기 때문에 이정도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신발을 신고 다같이 현관문을 나서려고 문을 열었는데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움찔하고 아빠 눈치를 보고 있는 아이들 뒤에서 엄마가 한마디 했다.
"이런 날씨에 운동하러 나가면 감기 걸려. 다 들어와!!"
아이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아침에 동네 한바퀴(5km)를 혼자서 달렸기 때문에 혼자서 고집을 피우며 밖에 나가서 달리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온 아빠는 아이들에게 집 안에서 달리기 보강 운동을 하자고 말했다. 두명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막내 아들만 거실에 남았다. (아빠가 막내 아들을 좋아하는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뭐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4월 초에 못했던 푸시업 챌린지를 하자고 아이들을 불렀다. (매월 1일에 아빠와 세 아이들은 푸시업 챌린지를 하고 있다. 30초 동안 한명씩 푸시업을 하고 3세트를 반복해서 순위를 결정한다. 물론 상금이 있다. 1등은 $10, 2등은 $5, 3등은 $2이다.) 4월 1일에 시간이 안맞아서 하지 못했던 푸시업 챌린지를 하자고 아이들에게 말했더니 첫째 아들과 둘째 딸이 거실로 나왔다.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했다. 막내 아들이 1등, 큰 아들이 2등, 둘째 딸이 3등, 아빠가 꼴찌였다. 대부분 마지막 순서를 선호한다. 그래서 순서는 아빠, 둘째 딸, 큰 아들, 막내 아들 순으로 결정했다. 1세트에서 아빠가 22개를 했다. 괜찮은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둘째 딸이 26개를 했다. (참고로 1월부터 3월까지 둘째 딸이 모두 1등을 해서 우승 상금을 받았다. 4명중 유일한 여성이지만, 우리 가족 푸시업 챌린지 디펜딩 챔피언이다.) 큰 아들은 20개를 했다. 막내 아들이 자세가 조금 엉성했지만, 그래도 32개를 했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둘째 딸은 당연히 자기가 이번에도 1등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이 앞질러 가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
2세트에서 아빠는 25개를 했다. 이어서 둘째 딸이 32개를 하며 강한 승부욕을 드러냈다. 동생에게 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다음으로 큰 아들 차례가 되었는데, 어차피 1, 2등은 동생들의 경쟁이 될 것 같다고 말하며,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며 힘을 아끼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8개를 했다. (영리한 녀석..ㅋ) 마지막으로 막내 아들이 31개를 했다. (현재까지 1등: 막내 아들/63개, 2등: 둘째 딸/58개, 3등: 아빠/47개, 4등: 큰 아들/28개) 이정도면 순위가 이미 결정이 된것 같았다.
3세트를 시작하며 아빠는 23개를 했다. (후회없이 최선을 다했다..ㅋ) 이어서 둘째 딸이 무려 40개를 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동안에 팔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더니 연막작전이었다. 큰 아들은 승산이 없는 경기에 힘을 쓰지 않으려고 이번에도 천천히 8개만 했다. 드디어 막내 아들 차례가 되었다. 1세트에서 막내아들이 했던 32개 정도만 하면 이번에도 누나가 1등을 하게 된다. 자세가 완전 엉성하고 몸을 비틀면서 빠른 속도로 갯수를 늘려갔다.
32, 33, 33, ... 37, 38, 39.
39개에서 시계가 멈췄다. 4월 푸시업 챌린지 결과가 나왔다.
1등: 막내 아들/102개
2등: 둘째 딸/98개
3등: 아빠/70개
4등: 큰 아들: 36개
둘째 딸은 동생에게 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 막내 아들이 푸시업을 할 때, 정자세로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부터는 주의를 줄지는 아빠의 재량이다. 너무 엄격한 기준을 요구할 수 없어서 적당히 진행을 했더니 아이들이 실력보다는 요령이 더 늘어가는것 같다. 막내 아들의 불량한 자세에 주의와 경고를 주어야 했지만, 그동안 가족 달리기와 운동을 가장 열심히 참여했기 때문에 살짝 눈감아 주었다. 아이들의 운동능력을 향상시키고 선의의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기준을 도입해야 할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기온이 영하 5도(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체감 온도 영하 18도)까지 내려갔다. 이정도면 정말 봄이 한참 남은것 같은 날씨다. 아빠는 아침 달리기를 포기했다. 대신에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 막내 아들이 수영 수업을 하는 동안에 학교 운동장에서 기다리면서 달렸다.
운동장에는 럭비를 하는 사람들과 트랙을 뛰고 있는 키가 큰 백인 남자가 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같이 뛰면 서로에게 자극이 될것 같았다. 가볍게 몸을 풀고 70-80%정도 속도로 달리기를 시작하는데 그 사람이 내 옆을 빠른 속도로 추월하며 지나갔다. 그 사람을 따라가려면 속도를 많이 올려야 할것 같았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아직 몸이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욕심을 부리는 것이 별로 좋을것 같지 않았다. 괜히 엉뚱한 순간에 승부욕을 내려고 하다가 부상을 입게 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내 속도를 유지하면서 3km 정도를 달렸다.
이제 몸이 슬슬 풀리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속도를 조금씩 올렸다. 직선 주로에서는 80-90%정도 속도로 달리고, 곡선 주로에서는 그대로 70-80%정도의 속도를 유지했다.
5km를 달린 후에 속도를 조금 더 높여서 90%정도의 속도로 시간을 측정하면서 1km를 달렸다. 4분 52초/km 속도로 달렸다. 이정도면 처음에 나를 추월했던 사람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운동을 마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다 때가 있는것 같다. 몸이 풀려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때가 있고, 처음에 욕심부리지 말고 속도를 조절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는것 같다. 순리를 거스르면 탈이 나기 때문에 때에 맞게 운동해야 한다.
코로 호흡하면서 4분 52초/km의 속도로 달린 것으로 오늘은 만족한다. 마지막 한바퀴는 속도를 줄여서 천천히 달렸다. 막내 아들 수영 수업이 조금 더 길었다면 10km를 채울 수 있었을것 같지만, 아쉬운 마음이 들 때 마무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