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심(人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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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보에 있는 내내 마음이 참 편안했다. 그래서인지 띠보에서 쓴 편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도 ‘안정감’이다.
내게도 여느 도시인들처럼 시골에 대한 동경이 있다. ‘시골’이란 단어가 주는 소박함과 평화로움, 맨발로 흙을 밟는 게 어색하지 않으며 더불어 자연과 사람 또 우리 집과 옆집의 거리가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이곳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떠올린 말은 ‘인심(人心)'이었는데 난 이 말의 뜻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새삼 신기하게 다가왔다.
'인심이 좋거나 후하다'라는 말은 결국 '거기에 사람의 마음이 있음'을 의미한다. 상대적으로 '인심이 각박하다'라는 건 '사람의 마음이 부족하거나 없음’을 뜻하는데 두 말 모두 사람 사는 곳에서 사용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요즘에야 이 말을 음식점 주인이 주는 서비스에나 사용하게 됐지만 조금 더 본래의 쓰임을 생각해보면 이 말은 내가 가진 것을 조건 없이 내어놓을 때 사용된다. 배고픈 사람을 위해 음식을 나누고, 힘이 센 누군가가 힘없는 사람을 지켜주며 각자가 가진 능력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될 때 ‘인심 썼다’라는 말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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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보는 이 ‘인심(人心)'을 느낄 수 있던 곳이었다.
이 작은 마을을 여행하며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식사하셨어요?”였는데 이곳에서 난 참 많은 밥을 얻어먹었다. 심지어 반찬까지 싸주셔서 숙소에 돌아와 먹기도 했다. 이런 순간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는데, 그땐 우리 집 문이 잠겨있으면 옆집에 가서 기다리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옆집에 들어가면 아줌마는 늘 먼저 “밥은 먹었어?”물으셨고 반찬이 많건 적건 밥상을 차려주셨다. 그 당시 내겐 그런 옆집이 여러 곳 있었다.
현재 내가 살고있는 연립주택은 원래 한층 당 한 가구만 살도록 지어졌지만 지금은 쪼갤 수 있을 만큼 쪼개어 3층 건물에 8세대가 모여 산다. 방과 방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우나 심적인 거리는 이상하게도 먼데 난 이들 중 그 누구와도 밥을 같이 먹거나 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반면 띠보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그 집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보다 옆집 사람이 밥은 챙겨 먹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 내가 띠보를 방문했을 땐 김장철이었고 그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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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엔 '칫빳(chin pat)’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김치와 유사한 음식이 있다. 채소를 소금에 절여 양념을 버무리는 방식도 같고 장기간 보관을 위해 커다란 장독대에 넣어두는 방식도 유사하다. 무엇보다 김장을 하는 모습이 비슷했는데 김장날이면 마을 주민 모두가 한 장소에 모여 칫팟을 담갔다. 건물 밖에 자리 잡은 이들은 채소를 다듬었고, 건물 안 마당에선 다듬은 채소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고, 집 안에선 양념을 만들었다. 대충 헤아려보니 20명쯤 됐다.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더 많았고. 여기 모인 사람 모두가 가족이냐 물어보니 몇은 가족이고 몇은 이웃이라고 했다. 내가 호기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여쭤보자 아주머니가 자연스레 물으신다.
“사삐비라?(밥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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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시삐비라?” 문자 그대로 "밥 먹었어?"를 의미하면서 ”How are you?”처럼 가볍게 사용되는 인사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참 따뜻한데 이걸 단순히 ”How are you?”로 번역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의 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가 영미권에서 하아유가 아닌 "Do you get up each morning too?” 번역된 것도 비슷한 이유일 테다. 보통은 먹었다고 대답하지만 이 날은 여러 칫빳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아 식사 전이라 말하니, 아주머니 한 분이 바로 마당에 상을 차려주셨다. 제일 먼저 나온 음식은 방금 만든 칫빳. 우리나라로 치면 김장날 엄마가 이제 막 양념한 배춧잎을 돌돌 말아 입에 넣어주시던 그 겉절이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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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칫빳은 한국의 갓김치와 맛이 비슷했다. 양념은 매웠고 한국 김치와는 다르게 채소의 향이 강했다. 이어서 떡을 주셨는데 찰떡처럼 쫀득하면서 맨 아래엔 설탕이 깔려있고 중간중간 잘린 코코넛이 들어 있다. 다음에 주신 것도 떡인데 이건 술빵과 아주 비슷했다. 이어서 밥을 주셨고 내가 밥을 다 먹을 때쯤 동네 아이 둘이 와서 내 앞자리에 앉아 같이 밥을 먹었다. 두 가지 칫빳을 더 맛봤는데 하나는 물이 잘박해 우리나라 물김치와 비슷했고, 다른 하나는 채소에 콩가루를 무친 것으로 나물무침과 비슷했다. 뭐가 제일 맛있냐는 물음에 한국 김치와 비슷한 처음 걸 가리키니 한 끼는 족히 먹을 만큼 싸주셨다.
재밌는 건 이들도 한국에 ‘김치'라는 음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 물어보니 대답은 짧았다. ‘드라마’ 내가 신기해하며 웃자 드라마 제목을 알려주셨는데 미얀마어로 말하셔서 알아듣지 못했다. 밥을 다 먹자 따뜻한 차를 주전자에 담아 가져다주셨고, 차를 다 마신 다음 난 그들의 사진을 찍었고 그들은 내 사진을 찍었다. 같이 찍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