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마음의 에너지 통이 있다고한다.
이 통이 비어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걸 담을 수 있다.
하지만 그 통이 과거의 상처와 억눌린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좋은 걸 채워 넣으려 해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래서 변화란
‘새로운 걸 넣는 일’보다
‘막고 있던 걸 빼내는 일’부터 시작된다.
운동을 통해 몸의 통을 키우거나,
글쓰기나 상담을 통해 묵은 감정을 꺼내는 일.
그게 결국 변화의 첫걸음이다.
사람은 낯선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택한다.
익숙함은 곧 안전이니까.
매맞는 아버지에게서 자란 여자가
자신을 통제하는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도
그 통제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과거의 연애는 불닭비빔면 같았다.
자극적이고 뜨거웠지만, 남는 건 속 쓰림뿐이었다.
지금의 연애는 콩국수에 가깝다.
처음엔 밋밋했지만, 먹을수록 편안하고 오래간다.
여친의 호의가 낯설었다.
그 따뜻함을 받는 게 어색했다.
어릴 적 부모의 가스라이팅 아래에서
‘받는 사람은 약자’라는 인식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내 말을 들어달라’는 절박함 속에 살았다.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목소리를 키우며 살았다.
1. 글로 적어보기도 하고
2. 목소리를 높여보기도 하고
3. 반복해서 설명해보기도 하고
4. 설득도 해보고
5. 화도 내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엄마의 내면엔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사과하면 진다, 나약하다는 믿음.
약해지는 순간 세상이 자신을 덮칠 거라는 공포.
그건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 상처의 파도가 나에게까지 미쳤을 땐,
나는 그저 불쌍하고 딱했다.
10년 동안
같이 밥도 먹어보고
상담도 받아보려 했지만
결국 남은 건, ‘이제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내가 다가가고 호의를 베풀수록
엄마는 이때다 싶어 나를 이기려 하거나 이용하려 했다.
그때 정신과 선생님은
“이제는 벽을 치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기뻐하며 말했다.
“보라, 선생님도 벽 치고 살라잖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서늘했다.
엄마에게 벽은 ‘상하관계의 천장’이었고
나에게 벽은 ‘단절’로 느껴졌다.
그때 생각했다.
벽이 아니라, 강이 흐른다고 생각하자.
강은 단절이 아니다.
멀리서도 서로의 안부를 볼 수 있고,
정 마음이 닿으면 다리를 놓을 수도 있다.
다만 그 다리를 건너기 위해선
상당한 수고와 의식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이제 나는 안다.
나와 엄마 사이엔 큰 강이 흐르고 있다.
그 강 덕분에 나는 숨을 쉴 수 있고,
엄마의 세상과 내 세상을
각자의 리듬으로 살아갈 수 있다.
변화는 ‘관계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기준을 새로 세우는 일’이다.
나는 벽을 세우지 않았고,
다만 강 하나를 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강이 흐르는 쪽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지켜내는 법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