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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자 Oct 18. 2023

알람

 작업실을 빙자한 내 방에 앉아 하루 종일 쓰고 지우는 일상이 계속된다. 별다른 술약속이나 데이트가 없는 한 ‘오도카니’라는 말로 축약 가능한 나날들이다. 이런 반 자발적인 칩거 생활이 어느새 익숙해진 걸 보면 글쓰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동 활동이 아닐까 싶다. 컴퓨터나 휴대 전화가 없던 시대의 작가들은 이런 일생을 도대체 어떻게 버텼던 걸까. 초연결 사회의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작가들이 누렸을 온당한 고요가 내겐 없다. 시시각각 울려대는 휴대 전화 알람은 안 그래도 빈약한 내 집중력을 깨뜨리는 이 시대의 가장 과잉되고도 디지털적인 소음이다. 어느 밤. 당장 끝내야 할 마감이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의 분량이었기에 먼저 집중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줄 필요가 있었다. 만만한 게 휴대 전화였으므로 우선 쓸모없는 알람들을 모두 꺼두기로 했다. 손가락으로 액정을 켜서 하루 동안 쌓인 휴대 전화 알람을 하나씩 살펴봤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미세먼지 예보 알람이었다. 오늘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미세먼지 수치는 153㎍/m³로, 세계보건기구 기준 매우 나쁨 수준이었다. 화면엔 악마로 변한 빨간색 스마일 마크가 「위험합니다! 외출을 삼가세요!」라고 주의를 보내고 있었다. 언젠가 본 신문 기사에 의하면, 미세먼지 청정국에 사는 흡연자보다 미세먼지 위험 국가의 비흡연자가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현격히 높다고 한다.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금연 이 년차인 나로선 실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뉴질랜드에 사는 어느 신원 미상의 골초 백인 남성이 괜히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여름엔 그나마 좀 덜하다지만, 언제부턴가 외출하기 좋은 계절이 오면 나가기에 앞서 미세먼지 예보부터 확인하게 된다. 이런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어릴 적 그려 냈던 방학 숙제 안에서나 존재할 줄 알았는데. 호흡과 위험이 병치된 세상에서 살고 있단 게 가끔 안 믿길 때가 있다. 지금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옆 나라의 공장들과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 사이에서 무얼 하거나 할 수 없을지 고민하며 열어둔 창문을 꾹 닫았다.


 다음으론 무라카미 하루키의 리커버 한정판 에세이가 출간됐다는 알람. 워낙 책의 겉면에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라 이번에는 패스하기로 했다. 애호하는 패션 브랜드의 fw 신상이 출시됐다는 알람도 패스. 셔츠, 바지, 니트, 아우터, 신발 등등. 이미 지금 가진 옷만으로도 옷장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옷을 사면 살수록 점점 더 내 몸에 부위별로 집착하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뭐가 됐든 패션업계에 좋을 일인 것만은 확실하다.


 인스타그램 알람은 확인. 애인이 보낸 DM에 하트를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에도 수많은 피드와 밈과 하트가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 어쩔 때는 하루에 대사 한 줄 없이 상호 번갈아 보낸 DM으로만 메시지 창이 가득할 때도 있다. 확인 후 잘 읽었다는 표시로 하트를 누르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 이 의미 없는 소셜적 노닥거림에 대한 유익성 여부와는 별개로, 어쨌거나 마지막은 항상 하트로 귀결된다는 점이 좋다. 상대에게 무언가를 공유하고픈 마음도 따지고 보면 근원적으론 사랑이니까.

 문득 어릴 적 유행했던 가수 터보의 「Cyber Lover」란 노래가 생각났다. 그야말로 날카롭고 미래주의적인 노래 제목이 아닌가, 이제 와서 새삼 뒤늦게 감탄한다. 어쩌면 이 시대의 러브란 서로의 사이버(SNS)에 좀 더 성실해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와중에도 애인이 보낸 DM이 새로 도착했으므로 난 또 서둘러 하트를 눌러야만 했다.「킹 받는 말대꾸 강아지」라는 제목의 짧은 쇼츠 영상이었다. 정말로 강아지가 짖으면서 말대꾸하는 내용이 전부인, 별 거 없지만 역시나 아주 하찮고도 귀여운.  


 구독 중인 유튜브 채널의 업로드 알람도 빼놓을 수 없었다. 「ChooChoo’s Story」 채널에 올라오는 야생 다람쥐들의 영상은 내 일주일 중 가장 큰 위안이다.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50만 구독자들이 캐나다의 이 작은 숲속 친구들에게 매주 눈과 귀와 시간과 데이터를 할애하고 있다. 다들 자기 방의 침대에 누워 액정을 보며 흐흐거리고 있을 거란 사실이 가끔은 조금 섬찟하고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상에 나오는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도 나는 특히 나이 많은 다람쥐 쳐키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래 봤자 겨우 서너 살쯤 됐었을 거다. 국가와 종을 초월한 맹목적인 팬심의 이유라면 다름 아닌 균형감이었다. 이웃인 인간과 교감하되 쉽게 길들여지지 않고, 야생과 인위를 적절히 구별할 줄 아는 균형감이 쳐키에겐 있었다. 매번 천적의 습격에 의해 신체 어딘가를 다치고서도 숲으로 되돌아가길 주저 않던 그 야무진 앞발을 기억한다. 쳐키를 통해 난 다람쥐의 삶이 아주 많은 위험과 용기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겨울. 겨울잠을 떠나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쳐키는 종적을 감추었지만 삶은 계속된다. 그의 후손과 친구들이 남아 여전히 인간과의 귀여운 공생을 이어가고 있다.  

 마음이란 종種도 아니고 크기도 아니고 그저 시선과 손끝 어딘가에 머무르는 게 아닐까, 올라온 영상에 좋아요를 누르며 생각한다. 똘망똘망한 다람쥐의 눈을 떠올리느라 차마 알람은 꺼둘 수 없었다.


 실종자를 찾는 재난 문자 알람도 있었다. 성북구에 사는 83세 최아무개 씨는 실종 당시 남색 패딩과 남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신장 146센티미터에 40킬로그램이라는 왜소한 체구가 눈에 띄었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재난 문자의 시대에서, 손안의 재난을 처리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점점 더 촘촘하고 인도적인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나는 큰 도시를 헤매고 있을 작은 사람을 상상했다. 모쪼록 속히 보호자의 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밖에도 배달 앱 알람, 추천 웹툰 알람, 카메라 어플 업데이트 알람, 스팸 전화 알람, 게임 알람, 주식 알람, 부동산 알람, 통신사 알람, 정육 세일 알람, 상품 발송 알람, 영화관 예매 알람, 페이스북 알람, 도시가스 알람, 은행 입출금 알람 등등 아주 많은 알람들이 줄줄이 쌓여 있었다. 어디까지나 “수월한 마감을 위해” 그것들을 하나씩 확인하거나 확인하지 않고 넘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막상 그 숫자에 비해 꼭 필요한 알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므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저 아주 약간의 배터리를 소모할 시간이면 충분했다.



 알람 [명사] 이 시대의 가장 과잉되고도 디지털적인 소음. 혹은 큰 세계와의 작은 연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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