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안은 지저분했다. 얼핏 쓰레기장으로 착각될 만큼. 다행히 밤이었고, 어둠은 도움이 됐다. 딱 보이는 것 정도만 비참해질 수 있으니까. 굴러다니는 박스 몇 개를 주워와 바닥에 깐 다음 엄마와 그 위에 드러누웠다. 덮을 신문지가 없단 게 좀 아쉬웠지만 지금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진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으면 그런대로 체온의 유지가 가능했다.
그 밤, 우리는 마치 작은 짐승들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우릴 봤다면 아마 동네의 떠돌이 개들로 착각했을 것이다. 존엄은 잠자리와 같이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단 사실을 그렇게 일찍, 그런 방식으로 깨닫게 될 줄 전엔 미처 몰랐다. 당시 난 겨우 열세 살이었다. 흔히 말하는 중2병이 와도 당연했을 나이였는데, 들이닥친 폭력들을 방어하느라 미처 그럴 틈도 없게 정신없이 지나가고 말았다. 과연 다행이라 해야 할지. 어쨌든 내게 있어 추억이란 마냥 긍정적인 명사만은 아니고, 아직까지 기억나는 건 그 밤 하나다.
발단은 부모님의 불화였다. 징조가 없진 않았다. 그전에도 아슬아슬했던 부모님의 사이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급격히 나빠졌고, 급기야는 하루걸러 부부싸움이 벌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싸움이래 봤자 힘의 우위에 따른 한쪽의 비겁하고 일방적인 폭력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날이면 난 가운데에 껴서 싸움을 말리거나 대신 맞고 있었다. 열성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추후 엄마로부터 똑같은 방식의 문책을 당했기 때문에 나로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문자 그대로 최선껏 맞고 요령껏 급소를 피해 갔던 날들이었는데, 이는 아직까지 내 인생의 모토로 남아있다. 아무튼 그날은 유독 아빠의 폭력이 정도가 심했던 날이었고, 맞다 못 견딘 엄마가 집밖으로 도망갔고, 아빠는 현관문을 굳게 검어 잠갔다. 몰래 열어주다 걸리면 나까지 쫓아내겠단 엄포를 놓으면서.
물론 그런다고 해서 잠자코 있었을 내가 아니다. 애당초 자식인 내게 엄마의 추방에 방관으로 동조하란 것부터가 부당한 요구였으므로 별로 고자질을 한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방 안에서 몰래 동태를 살피고 있다가 아빠의 인기척이 충분히 잠잠해졌다 싶었을 즈음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 자」. 아마도 집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었을 엄마는 곧장 답장을 보내왔다.
「문 열어 놔」
꼭 크리스마스의 못된 그렘린이 된 기분이었다. 난 엄마가 지시한 대로 몰래 현관으로 가 잠겨있던 잠금장치를 슬쩍 돌려놓았다. 거기까진 완벽했으나 다만 운이 없었다. 하필 엄마가 들어오려던 순간에 물을 마시러 나온 아빠와 다시 부엌에서 맞닥뜨렸던 거다. “으아악!” 아빠를 본 엄만 경기를 일으켰고 우린 나란히 집밖으로 쫓겨났다. 그나마 나까지 쫓아내겠단 약속을 아빠가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혼자보단 둘이 나으니까.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기억력은 좋다고 해야 할지, 참.
그렇게 쫓겨난 우리가 향한 첫 번째 숙소는 집 바로 코앞의 창고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코앞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오래된 연립 주택의 반지하에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일층엔 주인집이 쓰던 창고 공간이 있었다. 말이 좋아 창고지 내가 이사 오고 나서도 내내 방치된 데다, 안에도 쓰레기만 한가득이어서 딱 봐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한 번은 호기심에 들어갔다가 엄지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날아다니는 걸 보고 기겁하며 돌아 나왔던 기억이다. 내가 문자를 보내기 전까지 엄마는 혼자 거기 숨어있었다고 했다. 이젠 둘이 됐고, 이후의 전개는 서두에 기술했던 바와 같다.
“안 되겠다. 일어나 봐.”
얼마나 지났을까. 깜빡 잠들었던 날 엄마가 흔들어 깨웠다. 추워서 감기 들겠다고, 이러다 애 잡겠다며 일단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에이씨, 졸린데. 난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엄마의 걱정이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걱정에서 기인한 다정이라도 놓칠까 봐 두려워 얼른 엄마를 따라 창고 밖으로 나섰다. 그래. 폭력은 박명하고, 최후에 살아남는 건 언제나 폭력보단 다정이지. 그리하여 이루어진 그 밤, 우리의 짧은 야행.
자세히 둘러본 동네의 야경은 묘하게 평화로웠다. 진작 뛰쳐나오지 않았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어둠이 흩뿌려진 언덕길을 점선처럼 따라 내려가며 어째선지 난 꽤 안도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야간 드라이브라면 죽고 못 사는 나니까. 아마 밤 특유의 분위기가 안긴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었을까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 데나 대고 키스라도 날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 익숙한 경사면을 향해. 넓지 않은 보폭을 향해. 모서리가 없는 실루엣들을 향해. 고요를 향해.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진 가로등 조명들을 향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그림자를 죄다 집어삼킨 이 상냥한 어둠을 향해.
그렇게 부지런히 걸어간 우리가 두 번째로 묵게 된 숙소는 동네의 오래된 여관이었다. 세월의 때가 군데군데 낀 흰색 타일 외벽에 ㅇㅇ장이란 간판을 단, 지금 생각하면 흔하디 흔한 여관이었는데 그땐 그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침대에 누운 경험도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그 시트. 시트가 그렇게 흰색일 수 있다니. 누리끼리한 우리 집 이불과는 차원이 다른 극단적인 색상에 작은 충격마저 받았었다. 윤택이란 이런 사소한 컬러감에서부터 비롯되는구나. 윤택이야말로 어느 무엇보다 시각적인 단어로구나. 깨달음을 얻은 것도 잠시. 하룻밤 새 여기저길 전전하느라 우린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씻지도 않고 누워 있다가 누가 먼저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금세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 밤 우린 무슨 꿈을 꾸었던가. 삶이 내게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날이면 이따금 그 밤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본 통계에 의하면, 어릴 적 가정불화를 겪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궤양성 대장염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밤은 과연 내게 염증이었을까 항염이었을까. 모르겠다. 인생은 정말로 단언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그 밤에 우린 망가지진 않았다는 것. 그 밤을 기점으로 한때마다 뒤틀렸던 엄마와 내 사이도 서서히 원상 복구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린 그때만큼 위태롭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