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선 자주 인터뷰이가 된다. 문진이 이루어지는 장소니까. 근래 들었던 가장 기억나는 질문은 임신에 관한 거였다. 올해 출산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갑작스레 묻은 의사에게 당황해 순간 아무렇게나 둘러댔던 기억이다. 제 프라이버시를 왜. 무엇보다 저, 아직 미혼인데요.
이 아저씨. 의외로 오지랖이 넓은 타입인가 싶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약 때문이었다. 항시 약을 먹는 궤양성 대장염 환자들은 보통 의사와 먼저 상의 후에 임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제 삼십 대 후반이니까. 늦가임기 남성에게 건넨 의례적 질문이었을 거란 애인의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과장해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날 보며 애인은 피식거렸다.
“대체 뭐가 불안했던 건데?”
그러게. 뭐였을까. 평소 딩크족을 지향하던 애인과 나였다. 아이가 없을 우리에게 임신 부작용은 아무런 해당사항이 없다. 지금이야 서로 이견이 없다지만 사실 처음부터 내가 딩크였던 건 아니었다. 원래 성별 구분 없이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잔 주의였는데 반전으로 애인이 비출산주의자였다.
“애 낳으면 몸 망가지잖아.”
지극히 당연한 논리에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다. 내 자궁이면 몰라도, 자기 자궁 자기가 맘대로 하겠다는데. 순순히 애인의 계획에 편승했던 건 그래서였다. 솔직히 그땐 아직 먼 일이기도 했고 좀 충동적인 감도 없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내 쪽이 더 당시의 결정에 대해 확고해졌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몸 이 망가진 건 애인이 아닌 내가 되어버렸으니까. 삶은 공교롭고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합리와 모양으로 살아간다.
오히려 좋아. 애초부터 이인삼각은 소질이 없었어.
다정한 애인은 웃으며 내게 그렇게 말해줬다. 다만 소질을 떠나 졸지에 술래가 되어버린 애인에겐 미안한 마음이었다.
어느 날 난 애인에게 물었다.
“내 병이라는 거. 좀 우습지 않아?”
“뭐가?”
“그렇잖아. 인간이 달에도 가고 암도 고치는 세상에. 고작 이깟 염증 하날 어쩌지 못해서 평생 환자 신세라는 게.”
딱히 동정을 사려 한 말은 아니었다. 다만 좀 피곤했을 뿐이다. 투병을 지속함에 있어 꼭 임신이 아니더라도 스스로에게 의문 부호를 달 만한 상황은 여기저기에 존재했다. 가령 이건 해도 되는가? 저건 먹어도 괜찮은가? 같은 것들. 대답은 대부분이 “NO”였고 커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커피에 함유된 카페인 성분이 탈수를 유발해 장 활동을 자극시킨다나. 계속된 금욕 생활로 인해 난 좀 일종의 결핍 상태였다. 서촌 골목께의 고즈넉한 카페에 앉아 빨대로 커피를 휘저으며 애인은 내게 말했다.
“글쎄. 건강이라면 오히려 지금이 더 건강해지지 않았어? 약 먹자마자 컨디션도 바로 정상으로 돌아왔고. 내가 보기엔 전보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 같은데. 또 얼마 전엔 체력 기른다고 운동도 시작했잖아.”
애인의 칭찬에 급 우쭐해진 난 괜히 셔츠 아래로 팔뚝에 힘을 한 번 줘 봤다. 체력보단 정확히는 체내 염증 완화에 도움이 된대서 시작했던 운동이었다. 세간의 헬스 열풍과 맞물려 점차 본격적이 되어가더니, 급기야는 근시일 내에 태민의 ‘move’를 따라 추겠다고 수요 없는 공약을 선언. 애인으로부터 실성한 사람 취급을 받던 시절이다.(애인 왈: 태민이 아니라 테무 아냐?) 빨대 끝에 맺힌 커피를 입술로 쪽 빨며 애인이 물었다.
“마침 해주고픈 얘기가 떠올랐는데. 혹시 QQ라고 들어봤어?”
“아니, 처음 들어.”
“당연하지. 내가 말든 말이니까. Question Quotient. 직역하면 질문 지수? 내 생각에 환자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강녕함은 IQ도 아니고 EQ도 아니고 QQ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
약이 올라서 그런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 어려워.”
“예를 들어 볼게.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란 드라마 알지? 거기 보면 막간으로 딸들한테 간 이식받은 아빠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오거든.
“딸들?”
“응. 왜 딸들이냐면 두 딸한테 다 간 이식을 받아서야. 술 마시다 쓰러져서 첫째 간 이식받고. 회복하고 또 술 마시다 쓰러져서 둘째 간 이식받고. 그런데도 회복하고 또 술을 마시지.”
“징하다 징해. 어떻게 보면 나쁜 의미로 부지런하네.”
내 리액션을 연료 삼아 이야기는 달려 나간다.
“어떻게 됐겠어. 결국 극 중 담당의인 조정석 배우가 검진 결과를 보고 분개해. 딸들이 간 이식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다. 옛날엔 이식하다가 많이 죽기도 했다. 아버지를 위해 딸들이 목숨을 건 거라면서. 그러곤 잘못했다고 비는 환자를 강제로 전원시켜 버려. 이제 저 찾아오지 마시라고. 또 술 마실 게 뻔한 사람을 자기가 어떻게 진료하겠냐며.”
“사이다네. 역시 한국 드라마야. 사람들이 화내고픈 지점을 잘 긁어.”
“맞아. 그런데 우리가 사이다라 느끼는 이유가 뭘까? 내 생각엔 그가 나쁜 환자이기 때문이야. 나쁜 환자는 QQ가 낮아. 질문하지 않으므로 무책임한 단정에만 능할 뿐. 정답을 내릴 수도 없지. 내키는 대로 저지르고 결국엔 본인을 포함한 모두를 나빠지게 해.”
“그럼 좋은 환자는?”
“반대로 좋은 환자는 QQ가 높은 환자겠지. 환자를 떠나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일 수록 적어도 나빠질 린 없어. 당연한 이치야. 한 번 더 생각하고 본인을 절제할 줄 알지. 왜 불교의 참선도 보면 결국 모든 깨달음은 사소한 질문으로부터 비롯된다잖아. 정답을 갈구한단 점에서 환자도 수행자와 별반 다르지 않아."
“뭔지 알 것 같아.”
“그래. 핵심은 물음표야. 내가 볼 때 오빤 다행히도 QQ가 괜찮아. 커피 대신 앞에 놓인 찻잔만 봐도 알 수 있다고. 기특해. 그러니까 이제 징징대지 마. 캐릭터 겹쳐. 그 역할은 내 거야.”
애인이 QQ가 괜찮다는 부분을 꼭 사주 카페 사장님처럼 억양했으므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핵심은 물음표에 있다는 애인의 말을 마지막으로 곱씹으며 눈앞의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쓰고 깊고 미지근했다. 어떻게 해도 피로만은 가시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