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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먀니 Oct 10. 2024

좌약

 새해를 며칠 앞둔 어느 밤. 심호흡을 하고 침대맡에 섰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는 중. 손을 뻗어 눈앞의 그것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것은 말이 없다. 꼭 침묵으로 만들어진 작은 총알처럼.


 난 개의치 않고 엎드려쏴 자세로 침대에 누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다. 잠시 후. 방아쇠를 당기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 그저 겨누어진 방향으로 빠르게 쏘아져 나갈 뿐. 모든게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야심한 탓에 너무 오래 지체할 순 없었다. 때가 됐다. 그것의 이름은 좌약. 다름 아닌 병원에서 처방받은 좌약을 처음으로 사용하는 순간이다.


 하다못해 간단한 설명서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사용법을 알려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볼드모트의 이름이라도 되는 것 마냥. 덕분에 수고를 들여 유튜브의 시범 영상을 찾아봐야 했는데, 사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먼저 좌약과 함께 동봉된 일회용 손가락 골무를 검지에 낀 다음,  


 ⓵ 한쪽 무릎을 세워 배에 붙인다.

 ⓶ 옆으로 돌아누워 손가락 두 마디가 들어갈 때까지 항문 안에 좌약을 쑤욱 밀어 넣는다. 


 이렇게 두 단계만 거치면 끝. ‘손가락 두 마디’라는 구절이 다소 거슬렸으나 따지고 보면 항문은 개구부다. 화살표 방향이 거꾸로 된 생리 활동일 뿐이라고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럼 이젠 실전에 돌입할 시간. 미리 숙지했던 대로 먼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옆으로 돌아눕는다. 일 단계 완료. 이어서 손에 쥔 좌약 끝으로 톡톡 두드려가며 항문 위치를 탐색한다. 시야에서 벗어난 부위인 데다가, 터치가 이뤄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 항문이 제멋대로 오므라드는 통에 넣기가 쉽지 않다. 고작해야 좌약 끄트머리 부분을 항문 입구에 살짝 끼워놓는 게 전부다. 그마저도 조금만 힘주면 도로 쏘옥 하고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지만 말이다.


 아, 항문은 이토록 불수의근이구나. 새삼 인체의 신비에 감탄하며 난 애인에게 톡으로 SOS를 요청한다.


 「러브젤… 필요해요.」

 「고객님의 러브젤을 주말에 배송 예정입니다. 힘내세요.」


 오늘 낮. 첫 좌약 개시를 앞두고 걱정에 빠진 내게 애인은 의문의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환우 카페의 회원 하나가 자신의 좌약 사용 노하우에 대해 정리해서 올린 글이었다. 필요 없는 내용들은 빼고 핵심만 말하자면, 투약에 앞서 먼저 항문에 러브젤을 바르라는 것. 제품의 윤활성이 마찰력을 줄여 삽입 시 크게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러브젤이라면 우리도 지난 여행 때 사서 애인이 보관 중인 게 하나 있었다. 필요하면 가져다주겠다는 애인에게 난 일단 사양했다.     


 “왜?”

 “뭔가 비참하잖아….”


 뭐가 비참하냐고 애인이 재차 권할 때까지만 해도 고집을 꺾지 않았던 나였는데. 불과 반나절 만에 마음이 돌아서다 못해 간절해진 것이다. 그래, 성인용품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계속 넣었다 뺐다 하며 좌약과 섹스하느니, 속는 셈 치고 한 번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다가오는 주말. 애인은 본인이 다니는 회사의 초록색 종이백에 담아 내게 물건을 전달해 줄 것이다. 약속은 미래에 대한 긍정성을 담보하지만 현재를 어쩌지는 못한다. 주말은 주말이고 오늘밤은 일단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을 봐야 했다.


 체온으로 반쯤 녹아버린 좌약을 변기에 내린 뒤 새 좌약을 뜯었다. 전자기파가 꺼진 집 안은 지나치게 조용하다. 뭔가 소음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리모컨을 찾아 TV를 틀었다.


 때마침 켜진 모 지상파 채널에선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드레스. 턱시도. 축하 공연. 농담과 소감들. 박수 소리를 등으로 들으며 다시 한번 자세를 잡고 삽입을 시도했다. 역시나 어렵다. 혼자 낑낑대던 중에 문득 내게도 인디언 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럼 격려의 의미로 오늘밤 내게 인디언식 이름을 선물할 수도 있었을 테지. ‘슬픈 항문’이라는 이름이 적당하지 않을까? 내가 쓸데없는 망상에 빠져있는 동안 TV 화면에선 대상 수상자의 기쁜 수상 소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까 사실 할 말을 할 말을 다 해서, 말을 잘해야 하는데…. 아버지 생각이 좀 나고. 살아생전에 좀 더 잘해드렸면 좋았을 텐데요. 엄마, 나 대상 받았어요. 제주도 자주 못 가서 죄송해요. 아, 저희 집 강아지도 이상한 거 먹고 죽을 뻔했는데 다시 좋아졌습니다.

 …(중략)…

 이건 좀 주제넘은 이야기인데. 아이들한테 사인해 줄 때, ‘너 꿈이 뭐니?’ 하고 묻곤 합니다. 그런 다음 그 꿈에 맞춰서 ‘그렇게 돼라’고 써주는데요. 어머님 지인 분의 아기가 아픈데, 나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써 줄 말이 없어 한 삼십 분 정도 고민하다가 네잎클로버를 그려줬어요. 클로버가 원래 세 잎인데 상처가 나면 네 잎이 된답니다. 다들 행운이 있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짠 것처럼 나를 겨냥한 듯한 수상 소감에 깜짝 놀랐다. 감격의 박수를 치고 싶었으나 손가락이 항문에 꽂혀있어 사정상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대신 마음을 치는 걸로 퉁치기로 했다. 이런 공교로움이라니. ‘공교롭다’라는 말은 정말로 공교로워서 재미있다. 


 그나저나 클로버라. 그렇다면 나의 클로버는 몇 잎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면 확진된 후 다행이라는 말을 참 자주 썼다.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니는 대형 병원이 집 바로 코앞에 있어서 다행이야. 약이 잘 맞아서 다행이야. 네가 있어 다행이야, 등등. 참고로 다행의 ‘행’은 한자 ‘다행 행幸’ 자를 쓰는데, 이는 행운의 ‘행幸’ 자와도 같다. 낱말은 정직하다. 따라서 이토록 많은 다행이 존재하는 한 내게도 절반쯤의 행운이 늘 함께일 터였다. 정말로 행운이 있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전에 좌약부터 좀 넣고.


 시계는 어느덧 새벽 한 시를 넘어가는 중. 휴대전화를 켜서 웹으로 항문의 구조를 검색한다. 항문에서 직장으로 이어지는 부분까지가 생각보다 더 비스듬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알겠다. 중요한 건 힘보단 각도와 스냅이구나. 인생의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는 듯, 손목과 손가락을 살짝 구부려 안쪽으로 당기면서 다시 한번 진입을 시도한다. 그제야 항문은 항복하듯 순순히 입구를 열고 좌약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쏘옥.


 탕. 


출처: MBCentertainment 공식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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