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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먀니 Oct 21. 2024

통화(下)-전직

 어느 날은 또 일하는 중에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엔 스팸 전화인가 싶어 일부러 무시했는데, 두 번 세 번 연달아 걸려왔으므로 끝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ㅇㅇ 카드 ㅇㅇㅇ 담당자입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역시라는 낱말은 어떤 촉 좋은 사람이 만든 걸까. 그 선견지명에 새삼 감탄하며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하이톤의 목소리를 끊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저희 카드 고객분들 대상으로 좋은 혜택이 있어 연락드렸거든요.”


 혜택이란 말에 혹해서 들어보니 ‘역시나’ 보험 가입 권유였다. 얼마 전 포인트 혜택 때문에 신용 카드를 새로 하나 발급받았는데, 아무래도 그때의 가입 정보를 보고 연락해 온 모양이었다. 이번 카드 신규 가입자에 한해 당사에서 새로 출시한 암보험 이벤트를 진행 중이라고, 아직 광고도 안 한 대박 상품이라면서 끈질기게 가입을 권유했다. 어째서 내 당첨 운은 매번 계약과 지출을 전제로 하는 것들뿐일까. 이래서야 당최 돈을 모을 수가 없다. 괜히 애먼 사주를 의심하며 호시탐탐 끊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고객님. 주민 번호 뒷자리 한 번 불러주시겠어요?”


 무슨 개인 정보 확인을 위한 고객 동의가 필요하단 이유였나 그랬을 거다. 처음 통화한 사람에게 내 소중한 주민 번호를 실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슬슬 통화를 마무리지어야겠다 싶었다. 


 “괜찮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해당 사항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기요, 고객님? 이게 지금 아무나 가입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거든요. 정말 좋은 기회라서 그래요.”


 이런 반응은 예상 밖인데. 거절을 거절하는 사람을 거절하려는 이 상황은 대체 뭔가. 어떡할까 고민하던 차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 그 방법이라면 혹시? 과연 통할까도 싶었으나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난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고 조금쯤은 비통하게 말했다. 


 “사실… 제가 앓는 질환이 있어 암보험 가입이 불가합니다.”

 “네? 질환이라니. 어떤?”

 “UC라고… 희귀 난치병 질환자입니다.”

 “희귀 난치병이요?”

 “쉽게 말해 궤양성 대장염 환자입니다.”


 실토한다. 그냥 처음부터 밝혀도 될 걸, 굳이 UC를 먼저 언급한 건 어디까지나 의도된 연출이었다. 기왕이면 전문 용어를 써주는 편이 상대도 믿기 쉬울 테니까. 나아가 상대가 정말 전문 상담원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비질환자에 비해 암 발생률이 높은 궤양성 대장염 환자는 일반적인 암 보험 가입이 어렵단 사실을.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수화기 너머론 순식간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네. 궤양성 그거요….”

 “네. 궤양성 대장염입니다.”

 “네, 그거. 맞아요. 궤양성 대장염. 그럼 가입이 안 되시죠…. 음. 모쪼록 쾌유하시길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뚝. 통화 끝.


  좀 전까지완 다르게 순순한 태도로 물러난 상담원을 보며 난 좀 얼떨떨한 상태였다. 이렇게 쉽다고?  이제까지 느낀 병으로 인한 손해라면 전부 먹고 싸는 종류들 뿐이었는데. 알고 보니 아프다는 거, 굉장히 비보장적인 설움이로구나. 내 병이 확실히 중병이긴 한가 보다 싶었다. 나도 모르게 소실된 자격이 또 뭐가 있을지 헤아려보며 아직 액정이 형형한 휴대전화를 도로 내려놓았다. 전화 한 통만 받았을 뿐인데 어쩐지 확 피곤해진 느낌이었다.


 한편, 새 가입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내 명의로 된 보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갖고 있던 보험들은 계속 유지가 가능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내 앞으로 들어둔 암 보험 한 개랑 실비 보험 두어 개. 매달 20일마다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보험료를 아까워하면서도 귀찮아서 해지하지 않고 있길 천만다행이었다. 덕분에 앞으로 보험사의 등골을 쪽쪽 빼먹을 일만 남았으니까. 새 가입은 안 되는데 유지는 가능하단 점이 뭔가 아이러니하게도 느껴진다. 어떤 세계는 그토록 약관과 서류상의 방식으로 겨우 존속되기도 했다.


 보험은 아니지만 보장이라면 또 한 가지. 산정특례도 있었다. 산정특례란 중증 환자나 희귀 질환자에게 국가에서 진료비의 90%를 경감시켜 주는 의료 지원 제도를 말한다. 내가 가진 별도의 실비 보험까지 붙여 적용하면 원래 무려 44만 원에 달하는 분기별 약값을 거의 만 원대까지 줄일 수 있어 경제적으로 매우 요긴했다. 뭐라도 잡고 오를 튼튼한 지푸라기가 필요했던 시기였고, 그 파격적인 할인율을 자랑삼아 여기저기에 떠벌렸던 경험이다. “내 약값. 타이어보다 싸다!” 의외로 주변에서 호응들을 해 주어 한동안 나름 뿌듯해했었다. 주변이래 봤자 애인과 엄마와 철수. 이 셋이 전부이긴 했지만. 


 어쩌면 이 세상은 거대한 게임이고 난 그 속에 생성된 하나의 캐릭터가 아닐까?


 그런 공상을 한 적이 있다. 어릴 때 잠깐 빠졌던 발더스게이트란 게임에는 전직 시스템이 존재해서, 플레이어가 원하면 플레이 도중 언제든지 캐릭터의 직업을 바꿀 수가 있었다. 내가 비질환자에서 질환자로 중도에 전직했던 것처럼. 다만 그에 따른 페널티가 붙긴 했다. 전직과 함께 기존에 익힌 스킬들은 모두 비활성화 되었으므로 한동안은 약해진 상태로 적들과 싸워야 했다. 스킬 대신 막대기를 휘두르던 그때 그 캐릭터와 지금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이게 될 줄 누가 예상했을까. 보험 가입 자격을 잃은 대신 실비와 산정특례를 막대기처럼 휘두르며 생각했다. 


 물론 페널티만 있진 않았다. 전직으로 인한 메리트가 더 컸다. 훗날 캐릭터가 일정 레벨에 도달하면 이전의 직업도 부활, 이른바 듀얼로의 승급이 이루어졌다. 덩달아 사라졌던 스킬들도 원상 복구되어 그때부턴 제한 없이 두 직업의 능력을 모두 쓸 수 있었다. 검과 마법을 같이 익히고 싶었던 난 이 방법을 이용해 매번 검사–마법사-마검사 순으로 캐릭터를 육성했던 기억이다.


 현실은 때로 냉혹하고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일뿐이다. 게임과 달리 난치병 질환자라는 망테크를 탄 내게 이제 승급은 영영 요원할 테지만, 이 게임의 장르는 어디까지나 대전 액션이 아닌 롤플레잉이다. 비록 강력한 캐릭터를 잃었을지언정, 이야기의 여정에서 합류할 좋은 동료들과 반가운 행운과 즐거운 모험들이 여전히 나의 앞길에 놓여있다. 그러니 아직 게임 오버를 외치기엔 이르다고. 그렇게 위안하며 좀 전의 통화를 뒤로한 채 다시 흑과 백이 빼곡한 모니터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다만 더 이상의 스팸 전화는 이제 사양이었다.


제가 했던 버전은 2까지였는데. 최근엔 발더스게이트 3가 출시됐단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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