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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문 Feb 22. 2022

소백산 : 칼바람에 울고 설경에 웃고

등산 이야기 #1

지난 11월 11일. 길고 길던 업무 마감을 마쳤다. 스트레스에 머리가 터져버리기 직전에 끝맺음을 하니 허탈감이 밀려온다. '이 일만 끝나면 온종일 놀고 먹고 쉬어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나는 힘든 일을 지날수록 에너지가 넘치더라.

 

그동안 업무로 인해서 산행을 가지 못한 스트레스가 집에서 쉬고 싶다는 간절함보다 컸다. 나는 고통 가운데에서 더욱 열의가 넘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격언을 군생활 중 지겹도록 들었는데, 내 삶에서 적용이 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다음날 연차를 쓰고 산행을 떠났다. 기상시간은 오전 4시. 자는 시간도 아깝다고 느꼈는지 새벽에 계속 뒤척이다가 결국 대충 배낭을 쌓고 출발한다. 목적지는 소백산. 그저 드넓은 능선을 따라 정상에 다다르는 사진 한장을 보고 정했던 행선지였는데, 예상치 못한 설경이 나를 반겨주었다.

 


산행 중반부부터의 풍경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서울지역 날씨는 아주 미세한 눈알갱이가 날리는 정도. 때문에 방한용품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하였는데 설경을 마주하니 반갑기도하면서 아주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바람아 멈추어다오.

 


미지의 겨울왕국

대중적인 어의곡 코스를 들머리로 비로봉으로 향했다. 최단거리라 그런가 조망은 살짝 아쉬웠지만 오히려 비밀의 숲을 걷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이른새벽 출발한 덕분에 발길이 닿지 않은 길을 먼저 걸으니 마치 탐험가가 된 느낌도 들었다.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침 8시에 산행을 시작하였고, 주차장에는 나를 제외한 다른 일행 한 팀이 있었다. 마침 중간쯤 오르다가 하산하는 일행을 마주쳤는데 칼바람이 심하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한다. '에이 별일 있겠어?'라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무슨일이 벌어질지도 모른체..

 


비로봉까지 마지막 500m

상고대가 펼쳐진다. 이제껏 산을 다니면서 이런 상고대는 처음보았다. 바람에 흩날려 그대로 굳어버린 눈송이들이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맘놓고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왜냐하면 칼바람에 귀가 떨어져 나가기 일보직전이기 때문.

 


시베리아 인가

이정도는 조금 심한거 아닌가? 이정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 만들어낸 작품. 하지만 작품 감상항 시간 따위는 없다. 내 다리가 잘려 나가기 일보직전이니까.

 


나를 소백으로 오게한 그 길

이 능선하나 보고 소백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현실은 한쪽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저 끝에 보이는 정상비석까지 갈 수 있을지 망설여질 정도로 강한 바람에 제대로 서있기도 힘든 상황. 이럴줄 모르고 나는 왜 가을산행 복장을 하고 왔는지 스스로 자책하는 시간과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뿐.

 


굳어버린 눈송이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정상석과 어떻게든 인증하겠다고 발악하는 나. 휴대폰 배터리는 3%. 휴대폰도 나도 칼바람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다행이 인증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또 한번 깨달은 점이 있다면 정말 산이라는 곳은 오면 올수록 자신감이 생기기보다 나 자신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이후 장비병에 도져 잘쓰지 않는 스패츠와 스틱도 챙겨다니기 시작했다는 후문. 그래도 덕분에 역대급 상고대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 감사한 산행이었다. 라고 포장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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