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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문 Mar 10. 2022

한라산 그리고 백록담

한라산 탐방 프로젝트 #3

새벽 4시 반.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에 눈을 비빈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게스트하우스의 옆방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신속히 알람을 끄고 부랴부랴 침구 청리를 한다. 사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아마 설렘. 사실 백록담을 시도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날씨와 여러 여건상 한라산 입구만 구경하고 간지 벌써 2번째. 이번에도 한라산에 가지 못하면 나는 이곳과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마음을 내려놓으면서도 계속해서 날씨를 확인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두 번째로는 몸 상태였다. 일주일째 트레킹 여행을 하면서 나의 무릎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벌써 수많은 산을 두발로 걷고 뛰고 했던 경험이 있지만, 나이를 잊은 욕심 덕분에 몸상태를 챙기지 않고 일정을 감행한 결과 한 군데 두 군데가 고장 나기 시작하였고, 백록담을 오르기 전 그 통증은 정점에 달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가고 싶었기에 급하게 무릎보호대를 사고, 게하 사장님께 스틱을 빌리는 준비를 끝내 놓고 잠을 청했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무릎이 괜찮으면 가야지', '아니야 몇 시간 전까지 괜찮지 않았던 무릎이 갑자기 좋아질 리 없잖아?' 등등 여러 생각들 하면서 잠을 설쳤다.


하지만 설레이는 마음을 이성이 이길 수는 없더라. 날씨는 너무 좋았고, 거짓말처럼 무릎이 안 아픈 '듯'하였다. 그래 가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어둠의 한라산

새벽 6시 관음사 입구로 등반을 시작하였다. 캄캄한 어둠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이때를 위해서 헤드랜턴을 구입한 점이 스스로 기특했다. 설레는 마음을 감추고 오늘은 욕심부리지 말아야지. 한걸음 한걸음 스틱에 의지하여 뚜벅뚜벅 걷는다.


아직 겨울

얼마 올라가지 않아 바로 아이젠을 착용하였다. 3월 초의 날씨는 아직 겨울이었다. 눈으로 완전히 덮인 한라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 눈을 밟으며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새하얀 눈을 보면서 한 발씩 내딛다 보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얀 눈을 보니 머릿속도 하얘지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들과 고민들이 사라지는 이러한 장점이 계속 겨울산을 오르게 만드나 보다.


벌써 1200

얼마 걷지 않았는데 벌써 해발 1200m에 도달했다. 한라산은 시작 지점의 해발고도가 높기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금방 해발 1000m 지점을 넘을 수 있다. 굉장히 많이 걸어온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말이다.


산의 해발고도가 걸음 수를 대변하지 않듯이 사람마다 인생의 시작 지점과 살아온 걸음 수가 다르다. 하지만 현재 위치, 즉 해발고도가 높은 사람들은 보통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조금만 걸어도 높은 곳에 위치할 수 있는 점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때로는 시기와 질투를 사기도 한다.


하지만 등산을 조금 더 해보면 알게 된다. 해발고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실 얼마나 꾸준히 걸어왔는지가 더 중요하다. 낮은 산을 오르는 사람은 표면적으로 높게 오르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꾸준하게 걸어온 그 발걸음이 결코 의미 없는 순간들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았던 그 꾸준함은 언젠간 높은 산 일지라도 단숨에 오를 수 있는 단단한 근육이 되었있을 테니.


삼각봉 대피소

중간 대피소인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했다. 정상까지는 아직 더 남았지만 에너지 보충을 위해 조금 쉬어가기로 한다. 등산을 하면서 제일 기분 좋은 순간을 꼽자면 정상에 올랐을 때와 중간에 쉬면서 식사를 하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산에서 먹으면 라면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는 이 경험은 오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라면 먹으러 산에 온다고 하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산악인

어른들이 등산복을 왜 이렇게 좋아할까에 대한 답을 내릴 겨를도 없이 아웃도어에 매료되어왔다. 물론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패션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지만 이 편안함에 맛들리다 보니 평상복도 편안한 룩으로 점점 변해가더라.


마지막이 난코스

삼각봉 대피소까지는 무난하게 올라왔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을 뿐이지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백록담까지 가는 코스가 생각보다 힘들었다. 사실 조금 방심하여 호흡 조절을 하지 않고 온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숨은 가빠지고 중간중간 쉬는 순간들이 더 많아졌다.


방심하지 말자. 순탄한 길이었다고 앞으로도 순탄할 것이라는 착각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자. 끝이 어디에 있든지 그 끝을 향해 가는 모든 길 위에서 호흡을 잃지 않고 꾸준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자.


백록담

드디어 백록담에 도착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발 한발 걷다 보니 어느새 백록담이 눈앞에 있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백록담을 삼고초려하여 드디어 보게 되고 나니 감격스럽기도 하였지만, 이내 금방 지루하여진다. 무엇이든지 간절하게 얻고자 하고, 그것을 쟁취한 그 순간은 무엇보다 즐거울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삶은 사실상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래도 일단 쟁취하고 보는 것이 내 성향에 맞다.


열렬한 인파

그래도 새벽에 일찍 출발한 덕분에 더 엄청난 줄을 기다리지 않고 정상석 인증을 할 수 있었다. '저렇게까지 오래 기다리면서 사진을 찍고 싶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 즐거움은 생각보다 크더라. 나도 한참을 기다려서 인증사진을 찍고 정상에서 한참을 놀고 구경하다가 하산하기로 한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

정상에서 꽤나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자주 오지 못하는 곳이다 보니 질릴 만큼 실컷 구경하다가 내려가기로 하였다. 하산길에서는 올라오면서는 보지 못한 운해를 구경할 수 있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을 넘어서 실제 구름 위를 걷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한라산 백록담 산행을 마치게 된다


이번 일주일간의 한라산 둘레길을 포함한 윗세오름 그리고 백록담 전체를 둘러보고 싶었지만, 중간 부상으로 목표를 완수하지 못했다. 예전의 나였으면 목표 달성을 하지 못한 아쉬움으로만 가득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부족함이나 게으름 때문이 아닌 예상치 못한 어려움으로 인한 점들은 나로 인한 것들이 아니다. 결과 중심적이 아닌 과정을 볼 수 있는 눈과,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깨달음은 작지만 이번 여행에서 얻은 선물과도 같다. 인생의 길 위에서도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며, 필요하다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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