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병에 걸린 게 아닌가 걱정됐다. 아픈 것도 아닌데 입맛이 사라졌다. 반대로 후각은 예민해졌다. 갑자기 모든 음식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다. 국, 찌개, 반찬 어느 것 하나 성한 게 없었다. 참고 먹다가 도중에 화장실로 뛰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맨밥을 물에 말아 김치를 얹어 먹으려 해도 김치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점심을 건너뛰고 저녁을 대충 때웠다. 2주가 지나고 3주가 다가오자, 살이 쪽쪽 빠졌다. 8kg가 줄었다. 주변에서 다이어트하냐고 놀렸다.
먹는 게 시원치 않으니 기력이 없었다. 우울하고 짜증 나고 만사가 귀찮았다. 더 힘든 건 그런 감정을 어디에도 표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직장에서는 상사가 나를 평가하고 집에서는 아내가 감시한다. 자칫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점심을 굶고 공원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볼을 타고 내려오는 차가운 눈물에 흠칫 놀라서 도망쳤다. 사람이 먹지 못하니 없던 감수성도 생기는 모양이었다.
유난히 MSG에 더 민감했다. 집에서는 그런대로 괜찮다가 밖에 나오면 속이 메슥거리고 오심이 일었다. 입덧을 시작하는 임부처럼 구역질을 했고 정도가 심해지면 구토를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외식을 안 하던 사람도 아니고, 집 밖 음식을 싫어하던 사람도 아니었다. 한창 외식에 빠졌을 때는 일주일에 일곱 번을 밖에서 해결할 만큼 먹는 걸 좋아했다. 주변에서 미식가 소리는 못 들어도 탐식가로 불리며 내가 추천하는 맛집에 신뢰를 보냈다. 그런데 이젠 물과 커피 말고는 입에 대기 힘들었다. 향미증진제에 대한 거부반응은 거의 모든 음식에 대한 거부로 발전했다.
옥수수와 고구마만 봐도 신물이 났다. 그러다가 그만 실수를 저질렀다. 고구마를 가져온 아내를 향해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고구마 원산지가 남미 아니야? 왜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괴롭히냐구?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래. 다시 눈에 띄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소리 지르는 순간은 시원했을지 몰라도 소리 지르고 나서는 내가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자책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구마가 날아와 내 눈두덩에 꽂혔다. 내가 미쳤나 보다. 못 먹어서 그러니 이해해 달라. 무릎 꿇고 애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빌어먹을. 그게 다 혀 때문이었다. 혀가 없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혀를 뽑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었다. 애초에 생기지 말았어야 했다. 혀가 없으면 어떻게 말하냐고? 인간이 얼마나 영악한데. 혀가 발성에 관여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방식을 찾았을 것이다. 새는 부리를 이용해 소리의 공명을 이용하고, 돌고래는 배속에서부터 소리를 끌어올릴 줄 안다. 사자는 포효하기 위해 혀보다 두개골을 더 많이 사용한다. 소리나 말이 아닌, 행동과 태도가 언어를 대신했을 수도 있다. 수화가 소리로 전달하는 언어보다 더 뛰어난 소통수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인간은 지금보다 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했을 것이고, 다른 나라의 말을 익히기 위한 수고를 덜었을 것이다. 멀리 떨어진 동료를 부르기 위해 목구멍이 터져라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되고,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것으로써 차단하는 편리함을 누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의도하지 않게 발생하는 독해와 뉘앙스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로부터 자유로웠을 테지. 그러고 보면 인간이 말을 언어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 건 큰 불행이었던 셈이다.
혀는 발성기관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처럼 소화기관이다. 음식을 입에 넣고 여기저기 굴리며 잘게 부수기 위해서는 확실히 혀만큼 좋은 도구가 없다. 음식물에 독이 있는지, 상했는지, 먹을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그러나 혀가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미각 때문에 인간은 고등한 두뇌를 갖고도 원시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많은 문제점은 바로 미각의 불안전성에서 비롯됐다.
인간만이 후각을 믿지 않고 혀에 의존한다. 인간의 후각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쉽게 피로를 느끼고 짜증스러워하며 신경질적이다. 두 개의 콧구멍이 동시에 냄새를 맡지 못해서 당번을 정하듯 번갈아 가며 냄새를 맡는다. 예전의 인간은 산속에서 채취한 버섯에 독이 있는지 분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먹어도 모른다. 위장을 통해 몸에 흡수되고 간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독인 줄 안다. 미각을 위해 후각을 포기한 뒤로 인간은 그야말로 미련한 동물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혀가 발달한 것도 아니다. 미각은 다양한 색상을 분간하는 시각처럼 다양한 맛의 스펙트럼을 구분할 만큼 예민하지 않다. 신체의 어떤 감각기관보다 속이기 쉬운 것이 미각이다. 사리가 분명하고 지혜가 출중하고 예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미각만큼은 둔하기 그지없다. 눈과 코를 막고 혀로만 레몬즙과 레몬식초, 인공향이 가미된 레몬주스를 구분하는 건 기적에 가깝다.
많은 성군과 영웅들이 고작 혀 하나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추악한 결과를 맞이했다. 세종은 당뇨에 시달렸고, 칭기즈칸은 변비와 설사 사이를 오락가락했으며, 알렉산더는 소금의 과다 섭취로 죽는 날까지 고혈압과 사투를 벌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맛에 있어서 인간이 얼마나 창조적인지 핏대를 세우며 헛되게 쌓은 자부심에 열광한다.
거의 한 달이 다 되었을 때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불안정하고 무딘 혀 때문에 과도한 향미증진제를 섭취하고 서서히 말라죽어가는 꼴이라니. 게다가 나는 영웅도 아니었다. 다만 몸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너무 많이 먹었을 뿐이다.
우연히 모임에 참석했다가 냉면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전에도 몇 차례 가던 곳이었다.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먹는 척 앉아있을까 고민했다. 구석에 박혀 입맛 핑계로 면을 남에게 덜어주고 냉면 사발을 들고 조금씩 홀짝였다. 왠지 역겨운 냄새가 없었다. 두 번 세 번 술술 넘어가자 죽었던 혀에 맥박이 돌아왔고, 네 번 다섯 번 넘기자 눈동자가 커지면서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양지와 닭뼈, 꿩으로 낸 육수에 살얼음이 낀 동치미 국물, 그리고 메밀면의 절묘한 조합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입맛 없다며 죽상을 하던 놈이 갑자기 혈색이 돌아와서 사발을 혀로 핥는 걸, 면 덜어간 사람이 보고 조용히 속삭였다. “사리 시켜드릴까요?”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젓가락을 멈추지 못했다.
한 달 만에 제대로 된 식사였다. 우중충한 세상이 천연색으로 바뀌었다. 재미없는 꼰대의 말이 흥미롭게 들렸다. 약도 그런 특효약이 없었다. 다음날, 퇴근하고 혼자 갔다. 이튿날, 퇴근하고 아내를 불러 같이 갔다. 아내가 실망했다. 사흘째 친구와 거기서 약속을 잡았다. 친구가 화를 냈다. 그렇게 나흘을 보내고 나니, 내 몸이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첫아이를 갖고 아내의 입덧이 심했다. 음식은커녕 냄새도 못 맡는 아내를 보면서 싫다는 등을 떠밀었다. 반신반의하던 아내는 크게 만족했다. 일주일 간 냉면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아내는 입덧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엔 왜 그렇게 밍밍했는지 모르겠다. 극도로 예민해진 후각이 맛의 진가를 찾아준 셈이었다. 둘째를 가졌을 때, 집이 수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내는 서울까지 나와 냉면을 먹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론 외식이 꺼려졌다. 양념이 강한 음식점은 되도록 피했다. 진짜 그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맛있게 먹다가도 MSG가 느껴지면 영락없이 설사를 했다. 모르고 먹고 나서 집에 와 변기를 붙잡고 후회한 날도 많다. 새로운 식당을 갈 땐 생체 검증을 거쳐야 하는 부담감에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물론 감수하고 일부러 찾아가 먹는 집도 있긴 하다. 일부 보도를 보니, 중국산 값싼 고춧가루에서 기준치 이상의 곰팡이균이 검출된다고 한다. ‘클로스트리디움 퍼프린젠스’라면 모르겠지만 ‘아플라톡신(Aflatoxin)’이라면 큰 문제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을까? MSG가 억울할 수 있다. 진짜 범인은 아직 모른다.
>> 먹는 법
1. 글루타민산 나트륨을 사용하는 집 뺀다.
2. 중국산 고춧가루 쓰는 음식점 뺀다.
3. 오래 장사했다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면서 종업원 착취하는 가게 뺀다.
4. 국물 맛이 오락가락하는 집 뺀다.
5. 그래서 남는 집이 있다면 가서 먹는다. 아니면 집에서 동치미 국물에 국수 말아먹는 게 속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