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 순대
거기, 버스터미널은 사병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휴가나 외출, 외박을 나온 사병들의 복귀 시간이 가까워지는 오후 4시 무렵이면, 폐차 직전의 버스까지 동원되어 술에 취한 군인들을 태우고 각자의 부대로 떠나갔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 마지막 자유를 즐겼다. 부대별로, 중대별로, 소대별로, 혹은 동기별로 맥주를 마시거나 당구를 치거나 다방을 들락거리면서 돌아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해 안달했다.
어디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든 결국 식사는 한 곳에서 해결했다. 중국집도 있었고, 분식점도 있었고, 백반집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모이는 건 순댓국집이었다. 그 집에 세 딸이 모두 연예인 뺨치듯 예뻐서 그런 게 아니었다. 순대 맛이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집 순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순대에 전복의 미학이 숨어있다고 믿는다. 세상 어떤 음식도 내장을 뒤집어 하나의 온전한 객체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순대는 그 어려운 걸 해냈다. 돼지를 입과 항문이 연결된 하나의 파이프로 보자. 그걸 통으로 뒤집으면 속이 밖이 되고, 밖이 속으로 들어가는 양자학에서 말하는 위치 변동이 일어난다. 껍질과 살, 피와 뼈가 기다란 창자 안에 담긴다. 밖에 있으면서 안에 있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도 존재하는 심오한 철학의 세계. 그게 순대다.
순대의 개념은 창자에 그를 둘러싼 외형을 집어넣는 게 핵심이다. 다른 음식엔 없는 새로운 요리 방식이다. 코끼리가 콧속에 들어가는 것과 흡사하다. 순대 하나로 돼지 전체를 먹을 수 있다. 돼지 전체의 맛과 한 마리 돼지의 사유. 우리는 모두 순대다. 우리 모두 속이 뒤집어진 순대와 같다. 순대를 만나 사랑하고, 순대를 만나 대화하고, 순대와 어울리며 싸운다. 순대는 철학자의 음식이고, 예술가가 도달하고자 하는 세상의 숭고한 이면이다.
그런데 그 집은 거기서 한 발을 더 나갔다. 질적으로 다른 순대 맛이 그것을 증명했다. 복귀전 마지막으로 순댓국과 소주를 마시기 위해 사병들이 피 터지게 자리다툼을 벌이는 이유였다. 순대 맛에 관해 들리는 소문이 많았다. 큰딸이 이혼한 이유와 대학생인 딸이 휴학한 이유가 고등학생인 막내딸이 날라리인 이유와 같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몇 군데 양념을 치고, 몇 가지 가공을 했다. 부득이 오해의 소지를 피하고자 시간과 지명과 사람을 달리했다. 그러나 당시 부대로 향하는 버스에서 내가 들었고, 보았으며, 상상했던 모든 것을 그대로 옮긴다. 어디까지나 이건 순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상엔 진짜 같은 거짓과 거짓 같은 진짜가 혼재되어있다.
전방의 허브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공간, 만장리에는 오래된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30여 개의 크고 작은 전방부대로 가는 버스들이 거기서 출발했고 거기로 도착했다. 원래부터 순댓집이 많았던 건 아니다. 순대는 정부의 양돈정책으로부터 비롯됐다. 그전에는 주재료인 돼지 창자가 귀했기 때문에 서민 음식이라고 할 수 없었다. 부유한 집안에서도 명절이나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니면 맛보기 힘들었다. 양돈업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세워지고, 전국 각지에 대형 도살장이 생기면서 그 주변으로 소와 돼지의 부속물을 재료로 한 음식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만장순대가 만장리에 터를 잡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금은 대형 주상복합단지로 탈바꿈되어 사라졌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만장오일장은 전국 12위권 규모의 도살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곳이었다. 전방에 있는 농가에서 소와 돼지, 닭, 오리, 개, 야생 꿩이나 너구리까지 오지 않는 동물이 없었다. 발 달린 짐승이면 쥐 빼고는 다 팔았다. 언젠가는 도살되기 직전에 야생 곰이 탈출하여 만장리 일대를 쑥밭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민가로 침입한 곰은 부엌 아궁이 옆에 웅크리고 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군부대와 경찰이 포획하기 위해서 가까이 가도 꿈쩍하지 않았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혀를 길게 빼고 침을 흘리며 스스로 자신의 생을 환각 속에서 마쳤다. 그 일로 도살장 관리자와 군청 공무원이 옷을 벗었다. 야생동물과 도살에 관한 법안이 개정된 게 바로 그 해였다.
처음 도살장은 장날에 맞춰, 5일에 한 번씩 운영되다가 한창 번성하던 때는 매일 심야까지 가축을 실어 나르는 차가 줄을 지었다. 정식 명칭인 오일장을 버리고 매일시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가축 도매시장이 상설로 운영되자, 수산물과 농산물도 산지에서 매일 출하되었다. 불어나는 가축 수만큼이나 사람들도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가축을 팔러 온 사람과 고기를 사러 온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그중에는 도살장을 구경하겠다고 얼빠진 구경꾼이 있는가 하면, 쓰리꾼처럼 새로운 기회를 엿보는 미심쩍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사람들이 모이면 돈이 따라붙고, 돈이 모이면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 마련이다. 악취를 따라 파리 떼가 꼬이기 시작하는 것도 어김없는 세상의 이치였다. 장사치를 상대로 하는 전문식당과 여인숙, 술집이 맨 먼저 들어섰다. 창녀를 거느린 포주들이 적당히 후미진 골목에 둥지를 틀었고, 곧이어 얼굴부터 딱딱하게 굳은 군바리들이 귀를 후비며 골목길에 어슬렁거렸다. 벌어진 지갑의 돈 냄새만큼 매혹적인 것은 없었다. 전국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노름꾼이 밤이슬을 맞으며 기어들었다. 마지막으로 건달들이 길거리에서 침을 뱉을 차례가 되자, 모든 것이 퍼즐처럼 완성되었다. 소똥과 피비린내로 범벅되었던 시장 밑바닥이 화려한 자본의 메카로 변모했다. 상권이 형성되면서 주변 땅값이 오르고 인건비와 임대료가 뛰었다. 한 번 돌린 엿장수의 회전판은 야바위꾼의 팽이처럼 회전력을 상실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작은 모터가 회전판 밑에서 돌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일부러 한 일도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조화롭고 완벽했다. 모르긴 해도 처음 도살장 사업을 추진했던 정부 관계자마저도 이렇게까지 아귀가 맞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도살장을 중심으로 큰 도로가 생기면서 논밭이 사라지고 볼품없는 시멘트 블록의 집이 차츰 늘어갔다. 학교와 병원이 생기고 관공서가 따라왔다. 그때부터 도살장 맞은편, 농약상을 중심으로 뒷길에 순대 골목이 형성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 골목에 순대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머리를 취급하는 국밥집도 있었고, 순댓국과 쌍벽을 이루던 선지 해장국집도 존재했다. 드물긴 했어도 빈대떡을 부치는 집이나 개고기집, 추어탕집이 있었다. 불과 백여 미터도 안 되는 골목 사이에서 부치고, 지지고, 볶고, 굽고, 끓이는 음식들이 하얀 김을 뿜으며 손님을 기다렸다. 먹자촌의 춘추전국시대를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엄밀하게 말하면 만장리에서 순댓집이라는 말이 떠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순대는 팔지도 않았다. 굳이 지칭하자면 돼지국밥이라고 해야 맞았다. 그러나 부산식의 돼지국밥과 엄연히 달랐다. 만장리에서 파는 것은 순대가 빠진 순댓국이었다. 그럼에도 순댓국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만장리만의 고유한 특성 때문이었다. 도살장에서 나오는 고기들은 주로 큰 업체나 유통업자에게 도매로 거래되었고, 창자 따위의 부속물들은 헐값에 개인사업자들에게 넘겨졌다. 그중에서 자투리 고기를 떼다가 파는 건 저렴하면서도 차리기 쉬운 장사였다. 누구라도 시장 바닥에 앉아 돼지머리를 삶아 팔면 되는 일이었다. 따로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불 지핀 솥을 옆에 두고 앉은뱅이 의자에 사과 궤짝을 뒤집어 올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허기를 채우려는 사람들은 들쩍지근한 냄새에 홀려 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막일꾼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시멘트 먼지로 칼칼해진 목구멍을 뚫어줄 기름기 가득한 음식이 필요했다. 값에서나 맛에서나 머리고기와 간, 콩팥, 염통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주변에서 마구잡이로 벌어지던 공사판 덕이 컸다. 먼지와 땀이 범벅되어 찾아든 막일꾼들은 순댓국밥을 좋아했다. 돼지고기 삶은 물에 파와 부속물을 넣고 고춧가루와 들깨가루를 뿌려놓으면 한 자리에서 소주 대여섯 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세상이 마냥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한창 만장리가 번성하던 어느 해, 정초부터 유난히 서북풍이 많이 부는가 싶더니, 장마 때 내리는 비가 심상치 않았다. 보름 동안 쉬지 않고 퍼 붇는 비에 공사판을 떠나는 일당벌이들이 늘어갔다.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니냐며 구멍 난 하늘을 향한 상인들의 입에서 푸념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런 염려가 현실이 될 줄 아는 이는 없었다.
장마가 막바지에 이르던 어느 날, 강물이 둑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넘실대다가 한순간 도살장으로 범람했다. 둑이 넘치자 제방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거리로 쓸려 나온 물은 하수도 시설이 미비한 만장리를 순식간에 물바다로 만들었다. 진행 중이던 공사들이 중단되고 세워졌던 집들이 붕괴됐다. 순대골목에 어른 키만큼 물이 찼다. 한 밤중에 갑자기 불어난 물을 피해 사람들은 지붕과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떠내려가는 소와 돼지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날이 밝은 다음에야 떠내려 간 것이 소 돼지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운은 멈추지 않았다. 미처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괴질이 돌았다. 오일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고, 남아서 후일을 도모하던 일꾼들이 짐을 챙겨 다른 도시로 떠났다. 토박이 없는 뜨내기 도시의 한계였다. 한동안 장사가 어려워질 것은 물 보듯 빤한 일이었다. 도살장을 재가동하기 전까지 나오는 고기도 없었다. 좌판을 깔았던 사람들조차 솥을 엿 바꿔 먹고 다른 허드렛일 찾아 나섰다.
남은 사람들은 갈 곳이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생리가 불순한 늙은 매춘부와 판이 없는 노름꾼이 대낮부터 술에 취해 엉겨 붙었다. 거리에는 방역 차량을 쫓아 뛰는 아이들과 사역 나온 사병들이 전부였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누가 일부러 한 일처럼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모르긴 해도 도살장 사업을 추진했던 정부 관계자마저 그렇게 많은 비가 내릴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불경기였다.
여름이 다 지나도록 만장리의 복구는 더디게 진행됐다. 하수도 정비사업이 곧 시작된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그런데 다른 음식점들이 장사를 접거나 미적거리며 손을 놓고 있었던 그때, 새로운 가게 하나가 순대골목 안에 생겼다. 누구나 생각했을 법했지만, 누구도 실행하지 못했던 만장 순대라는 이름의 순댓국집이었다. 그때까지 만장 순대라는 이름은 없었다. 좌판에 간판이 있을 턱이 없거니와, 정식으로 차려진 가게조차 간판이 없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있다 해도 고작, 유리창에 붉은 페인트로 순댓국이라고 휘갈겨 써놓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누구도 만장리의 순댓집들을 만장순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가게엔 그 이름이 떡하니 걸려있던 것이다. 누가 불러주기 전까지 그것은 순대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불러주었을 때 그것은 만장순대가 되었다.
호기심에 찬 눈으로 가게 안을 기웃거리던 사람들의 눈에 생소한 것이 보였다. 무명천에 감춰진 채 둥글게 똬리를 튼 검은 물체였다. 표면은 희끄무레했고, 연탄을 축소한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곳에서 뽀얀 김이 피어올랐다. 언젠가 다른 장터에서 한번 먹어본 적 있는 장돌뱅이가 아는 체를 했다. 내장에 고기 살을 채워 넣은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마치 세상이 뒤집어진 것처럼 들렸다. 먹어보기 전에는 어떻게 만든 것인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궁금증에 못 이겨 생전 처음으로 순대를 맛보았다.
두세 명 앉으면 가득 차는 테이블 댓 개로 만장순대의 매상은 나날이 올라갔다. 제일 먼저 찾은 건 복구작업에 동원된 군바리들이었다. 오일장도 열리지 않았고 공사도 지지부진했지만 순대를 먹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은 골목에 가득 찼다. 담백하고 오묘한 순대 맛은 한번 먹으면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짭조름하고 들큼하고 달짝지근하면서 개운했다. 된장에 푹 찍어 마늘과 씹어 먹으면 어떤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누구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순대가 혀에 닿는 순간, 입 안에 퍼지는 감동은 하루의 노곤한 피로를 말끔히 걷어내고도 남았다.
먼저 군바리들 사이에 입소문이 돌자, 제방 공사에 투입된 일당치와 도살장 골발치들까지 기웃거렸다. 아침부터 해장하러 오는 양아치가 있는가 하면, 아예 소문을 듣고 먼 길을 돌아오는 장꾼도 있었다. 만장순대에는 아침저녁 할 것 없이 늘 손님으로 북적였다.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줄 서서 반나절은 족히 기다리기 일쑤였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도 맛을 음미하느라 뭉그적거리기라도 하면 줄 뒤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만장순댓집에 걸려있던 <5분 식사, 50분 휴식>이라는 표어가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도살장 재개장 심의가 떨어지고 강둑 정리가 마무리되면서, 추석 전에 오일장이 다시 서리라는 푸성귀 같은 기대감이 순대골목에 불었다. 떠났던 이들이 돌아오고 술독에 빠져 지내던 사람들의 눈동자에 생기가 넘쳤다. 좌판이 다시 등장했고, 비웠던 가게의 묵은 먼지가 털어져 나갔다. 손님 맞을 준비로 한동안 만장리는 분주했다. 만장순대를 모방한 가게가 곳곳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들에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도대체 순대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겉은 흉내 낼 수 있지만, 속은 불가능했다. 뒤집어보고, 갈아보고, 돼지 열 마리를 작살내가며 만장순대를 해부해도 비결을 찾지 못했다. 만장순대에 손님이 미어터질수록 다른 가게엔 파리만 날렸다. 비법을 전수해달라는 요구와 흥정이 빗발쳤다. 거액을 싸가지고 와 울며불며 매달리는 이도 적지 않았다. 만장순대 측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만장순대에 이상한 풍문이 따라붙었다. 어떤 손님이 순대를 씹다가 이빨을 발견했다. 돼지 뼈인가 해서 꺼내 보니 사람 이빨이었다는 것이다. 그 손님이 어느 누구냐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가게 측에서 금 한 돈 값을 주고 이빨을 회수해 갔다는 말까지 나오자, 사람들의 추측이 난무했다. 나름 통계학에 기반을 둔 추론을 내놓기도 했다. 수해 당시 실종자가 38명이었다. 27명의 시신은 수습했으나, 끝내 9구는 찾지 못했다. 행방불명된 시신이 다른 곳으로 흘러갔을 것이란 얘기였다. 뒷받침하는 정황이 있었다. 만장순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잦은 실종이었다. 길게는 1년, 짧게는 3개월 일하다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행방을 물어보면 일을 그만두었다는 해명뿐이었다. 퇴사인지 실종인지 모두가 뜨내기라 물어볼 곳이 없었다.
만장순대를 찾는 발걸음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은 만장순대를 알리는 훌륭한 홍보였다. 갈수록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럴수록 다른 가게는 문을 닫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나마 버티는 가게는 만장순대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그래야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을 수 있었다. 만장리는 만장순대와 순대가 아닌 다른 음식점으로 양분되었다. 만장순대는 문 닫는 가게를 매입해서 계속 확장했다. 거대한 순대타운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런가. 변수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아왔다. 첫 번째 돼지 파동이 불어닥쳤다. 돼지값이 소값을 넘어서자, 가게를 운영할 재간이 없었다. 규모를 축소하고 실리적으로 대응했다. 가격을 올리고 양을 줄였다. 고정 단골들이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하기 전에 연이어 돼지콜레라가 창궐했다. 그나마 찾던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오래갔다. 외부 손님만 오지 않는 게 아니었다. 도살장을 폐쇄한다는 발표가 나자, 만장리 전체가 휘청였다. 돼지콜레라가 지난 뒤에도 예전과 같은 호황은 오지 않았다. 제일 먼저 학교와 병원이 문을 닫고 관공서가 이전했다. 만장리는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도시로 변해갔다. 그러나 만장순대에겐 혈기왕성한 군인과 면회를 오는 가족이 있었다. 세상이 무너져도 계속 유입되는 영원한 호객이었다.
잘 버티던 만장순대도 IMF 금융위기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1대 창업주가 쓰러지고 2대 아들이 물려받았다. 빚을 청산하고 나니 달랑 코딱지 같은 가게와 발톱의 때 같은 자금이 남았다. 만장순대는 몸집을 줄이고 초심으로 돌아가 맨땅에서 다시 일어섰다. 위기 때마다 힘을 발휘한 건 사랑스러운 딸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와중에도 맛을 유지한 비결이었다.
간혹 누린내가 난다거나 선지가 신선하지 못할 때가 있다. 경기가 호황일 때 그렇다. 근래 어떤 노숙자가 사라졌는지 보면 답이 나온다. 경기가 불황일 때는 확실히 다르다. 방구석에 처박힌 취업 못한 좀팽이, 일당을 술값으로 탕진하고 길바닥에 쓰러진 단기알바생과 좀비처럼 여자 뒤꽁무니를 쫓다가 부대로 복귀하지 못한 탈영병, 산업현장에서 하루아침에 짤린 파견근무 노동자. 관심도 없고, 주목도 못 받는 사람들이 사라질 때, 그때가 순대 맛이 제일 좋다. 지금 3대 세습을 이룩한 그 위대한 가게의 초창기가 그랬다. 사회적 취약계층의 피와 땀으로 오늘의 만장순대가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사라진 자들의 위대한 침묵 위에서 잠을 자는 버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