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국밥
전주에 있는 동안 매일 아침 친구 손에 이끌려 콩나물국밥집에 갔다. 할머니 혼자 하는 집이었다. 새벽 5시부터 시작해 그날 준비한 국물이 떨어지면 문을 닫았다. 우리가 방문하는 시간은 오전 9시 전후였다. 한 번은 문을 닫았고, 한 번은 줄 서서 기다리다 재료가 떨어져 그냥 돌아왔다. 친구에게 시간을 앞당기면 먹을 수 있지 않느냐 물었다.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이 집은 말이야, 8시에서 9시 사이가 제일 맛있어. 너 토렴이 뭔지 알아? 밥을 국물에 넣다 뺐다 하면서 밥을 데우는 거야. 그러면 밥에 있는 전분이 빠지고 국물이 밥에 스며드는 거지. 너무 일찍 가면 국물이 싱거워. 너무 늦으면 국물이 짜고 탁해. 적당한 간과 농도가 맛을 결정하지. 그래서 사람들이 8시에서 9시 사이 몰리는 거라구.
그 말을 듣고 할머니가 국밥 마는 걸 유심히 지켜보았다. 밥은 전날 준비한다고 했다. 찰기와 쫀쫀함을 유지하려면 적당한 찬밥이 좋았다. 구멍 난 큰 국자에 밥을 담아 황태육수가 팔팔 끓는 솥에 넣었다 뺐다하기를 십여 차례. 밥을 뚝배기에 옮겨 담고 미리 삶아둔 콩나물을 얹은 후, 육수를 붓는다. 반찬은 깍두기 하나. 먹고 싶은 대로 퍼 간다. 계란이 판으로 있는데 역시 먹고 싶은 대로 가져다 먹는다. 한 그릇에 3천 원. 커다란 돈통에 손님이 알아서 계산하고 거스름돈을 챙긴다. 손님이 서빙하고, 식탁 닦고, 자리 배정하고, 그릇을 치운다. 할머니는 계속 토렴만 한다.
국밥은 국밥대로 먹고, 작은 종지에 계란 노른자를 풀어 참기름과 깨소금을 뿌려 먹는 것도 별미였다. 친구는 국물에 살짝 익히는 게 더 좋다고 했다. 아무래도 3천 원은 너무 싼 거 아니냐 했더니, 친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옛날엔 천 원이었어. 내가 믿을 수 없다고 하자, 2천 원 하다 천 원으로 내린 적이 있다고 했다. IMF가 터졌을 때. 그리고 몇 년 뒤에 갑자기 3천 원으로 올려서 황당했다고. 그 뒤로 계속 3천 원이라고. 나는 친구를 보면서 얘는 앞으로 서울에서 살기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결혼한 뒤, 대전에 다녀오는 길에 희미한 기억을 되짚어 찾아갔다. 밥물이 섞인 뿌연 황탯국에 청양고추와 콩나물이 섞인 뜨거운 맛을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가게가 있던 자리에 높은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 흔적조차 없었다. 만 원짜리 비빔밥을 먹고 나오는데, 솔직히 배가 아팠다.
여의도에 근무할 때, 종종 철야를 하고 새벽에 혼자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가곤 했다. 식당에 들어서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다. 상대가 웃으면서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앞에 보좌관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한 명 더 있었다. 국회 앞 식당을 그리 많이 다녀봤지만, 국회의원이 일반 식당에서, 그것도 새벽에 식사하는 걸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주문하고 식사를 기다리는데 그가 이런저런 걸 물었다. 무슨 일을 하느냐? 일은 힘들지 않으냐? 결혼은 했냐? 뭐 그런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냥 두런두런 새벽녘 식당에서 나눌 수 있는 대화였다. 본인은 국정감사 기간이라 며칠째 집에도 못 가고 그러고 산다고 했다. 지지하는 정당이 있냐고 해서 의원님 정당도 좋습니다. 했다. 집이 어디냐기에 사는 동네를 말했더니 본인 지역구로 이사 오라고 강권했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밥값을 내주고 싶지만, 유권자에게 밥 사면 큰일 난다며 농담을 했다. 대신 꼭 이사 오라고 악수를 청했다. 그가 떠나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일시적으로 감염되는 그런 증상이었다. 일로 몇몇 국회의원을 만나봤다. 언론에 나온 모습과 사뭇 달라서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전체적으로 따분하고 뻣뻣하고 딱딱했다. 그런데 그는 언론에서보다 더 소탈하고 정감이 갔다. 특권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이듬해 총선에서 그가 낙선하는 걸 개표방송으로 지켜봤다. 당시 전국을 강타한 뉴타운 열풍과 그의 서민 정책에는 괴리가 컸다.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갈 때마다 생각났다. 내가 누굴 좋아하면 안 되는구나 했다. 무슨 징크스도 아니고 좋아하는 정치인마다 다 정치권 밖으로 밀려났다. 몇 년 뒤 그가 다시 국회로 복귀했을 때, 누구보다 기뻤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는 곧바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정치인도 아니고, 비정치인도 아닌 어정쩡한 자리에 있었다. 가끔 텔레비전에 비치는 모습을 보면 머리숱이 더 빠져서 속상했다. 그러는 사이 나도 여의도를 떠났다. 그의 지역구로 이사 갈까 했는데 그가 지역구를 옮겨서 출마했다. 몇 번의 실패를 하고 20대 보궐로 국회에 재입성했을 때는 일부러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땐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목을 찔렀다. 자꾸 목이 멘 것처럼 아팠다. 침을 삼킬 때마다 눈물이 찔끔했다.
그 뒤로 콩나물국밥은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고 말았다. 아마 먹는다고 해도 목이 아파서 다 못 먹을 것 같다. 십여 년 전 여의도 지하식당에서 짧은 만남이 너무 긴 여운을 남겼다. 떼를 써서라도 사달라고 할 걸 후회가 들었다. 그렇게 빚을 졌으면 살아계셨을 때 후원계좌에 작은 정성이라도 보탰을 텐데. 사람이 미워지고, 일이 풀리지 않고, 변하는 않는 세상에 실망할 때마다 그의 이름을 검색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 노회찬. 그보다 토렴을 잘 아는 이가 또 있을까? 사는 게 세상에 담금질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