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스위스 설산 여행을 통해 느낀 것

by 월급쟁이 노마드

하반기 내내 12월만 기다려왔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사이 그 휴식 기간을 누구보다 기다려왔다. 모든 업무 스케줄을 12월 3주까지 맞춰두었고, 긴급 상황만 생기지 않는다면 아주 조용한 연말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에 너도나도 연말 휴가를 계획하고 있길래 나도 야심 찬 연말 여행을 준비했다.


뮈렌이라는 스위스의 산골 마을에 3일 정도 가서 산을 멍하니 바라보며 책도 읽고, 배우자와 대화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무엇보다 신년 계획을 멋지게 세우고 싶었다. 2025년을 떠나보내고 2026년을 맞이하는 멋진 여행이 될 것 같았다.


기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4시간 만에 도착한 뮈렌은 아주 작은 마을로, 둘러보는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고, 스키어들과 여행객들로 적당히 붐비는 곳이었다. 그린델발트나 인터라켄보다 조용하지만 적당한 즐길거리가 있었고 무엇보다 알프스의 3대 미봉이라 불리는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융프라우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그 아름다운 봉우리를 맞은편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왼쪽부터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뮈렌에서 케이블카를 두 번 갈아타면 2970m에 있는 쉴트호른 전망대에 갈 수 있는데, 360도로 회전하는 식당이 있고, 알프스 산맥의 줄기를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연말이라 특별히 회전하는 레스토랑 브런치를 예약하고 즐기면서 배우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너무나 정신없이 흘렀던 올해를 돌아봤다. 올해뿐만 아니라 지난 3년이 내겐 좀 힘들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한 3년이었는데, 내겐 운전면허증과 같은 박사 학위를 따고 나서야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4개 국가를 넘나들며 매년 습관처럼 계획을 세웠다. 어떤 해에는 이 나라에서, 이 역량을 키우고, 다음 해에는 한국으로 다시 갔다가, 공부도 하고, 그다음 해에는 결혼을 하고, 다시 해외 파견을 나가고, 이 모든 것들이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어쩌면 계획을 세우고 이루는 과정을 즐거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레스토랑에 앉아 360도로 돌아가는 설산을 넋 놓고 보고 있는데 배우자가 물었다. 올해 계획이 있냐고. 분명 올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계획하기 위한 여행을 온 것인데, 신년 계획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융프라우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이 그저 좋았고, 이런 순간들이 종종 있는 삶이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신년 계획을 세우면 또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내년 1월 1일부터 달려야만 할 것 같아서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다시 아름다운 산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꼭 계획이 1년 단위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지구의 공전 단위가 1년인 것이지 내 인생의 단위가 굳이 1년이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이루고 싶은 것이 떠오르면 그때 계획을 세워도 될 것 같았다.


만년설을 보며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일까, 거대한 자연의 에너지가 나에게 안정감을 준 것일까. 예전이라면 내년에 할 일들을 종이에 적고, 월 단위로 나눠서 해야 할 일을 수첩에 빼곡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계획이 필요하면 그때 계획을 세우면 될 것이다. (물론 소소한 계획들은 있다. 이번 겨울에 스키를 배우고, 여름엔 마요르카로 여름휴가를 가는 것 정도는)


굳이 계획을 강박적으로 세우지 않기로 했다. 계획이 필요하면 그때 세우는 것으로 하자.

어쩌면 그게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로 즐기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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