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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Sep 19. 2024

같이 늙어가는 모녀

 가끔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공유하는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릴 때가 있다. 다 같이 아는 사람인데 이름 한 자도 기억이 안 나서 "거 왜 있잖아. 머리 길고, 얼굴 동그래가, 생각이 날동말동한데... 환장하겠네." 그렇게 한참 동안 고민하다 누군가 이름 석 자의 한 자를 내뱉으면 또 누군가가 그 뒤를 알아내고 그렇게 이름 석자 퍼즐을 힘겨이 맞추고는 박장대소하는 일이 허다해졌다. 나도 마흔 중반이 넘어선 것이다. 사사오입도 아니고, 오십에 더 가깝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한참 수시접수하느라 바쁜 딸을 보니, 저 아이가 저렇게 자랄 동안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구나 싶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벌써 오십이라니, 우리 엄마는.... 하이구야,  진짜 할매네 할매. 우리 엄마는 언제 또 이만큼 나이 들어 버렸을까? 생각만 했을 뿐인데 엄마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다.

"손주가 내년이면 성인인데, 내가 우찌 안 늙겠노?"


 첫 손주의 존재를 알렸을 때, 손주를 만난다는 기쁨보다 당신이 할머니가 되어야 하는 사실을 더 서글퍼했다. 그래서 한 동안 본인이 할머니란 소리를 어디 가서도 안 했다고 했다. 그러다 핸드폰에서 귀염 뽀작 아가 사진이 발각(?)되고 가족관계상 할머니가 되고 만 사실이 들통나자 그제야 손녀자랑을 하셨다니, 어지간히도 할머니가 되는 게 싫긴 했나 보다. 그러던 중 어디서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는 "내가 할머니 아인교. 손녀가 있다카이." 한마디 했더니 "어머, 할머니처럼 안 보이시는데 어쩜 그렇게 젊으세요~ 완전 젊은 할머니네." 그 한마디에 우리 엄마는 그 뒤부터 젊은 할머니 컨셉으로 온 동네방네에서 인증을 하고 다니셨다. 


 예기치 못하게 엄마의 항암치료 때문에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기차에서 남은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린 친구를 보며 나 또한 친구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또, 엄마를 먼저 보내고 남은 아빠와 실랑이하는 친구를 보며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만만치 않은 아빠 뒤치다꺼리를 미리 걱정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 아직 엄마는 건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나는 아직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다가오고 있다. 경험상 이미 알고 있음에도 나에겐 아직 아니야라는 안이한 생각이 늘 우선이다. 빨리빨리는 잘하면서 미리미리는 왜 잘 안 되는 걸까? 뻔하게 보이는 데 미리미리 준비하면 후회라는 단어는 우리 인생에서 큰 의미가 되지 않을 텐데... 효도는 늘 게으르고, 후회는 부지런히 늘 곁에 따라다닌다. 

 

 엄마에게 '젊음을 최대한 유지하는 일'이란 지금 엄마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인 거 같기도 하다. 매일아침 6 천보를 걷고, 건강하게 챙겨 드시며 낮엔 친구분과 볕 잘 드는 자리에 앉아서 수다를 나누고 돌아오신다. 그 길에 시장도 들르시니 못해도 하루 만보이상은 꾸준하게 걷겠지?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아가서 원인도 알아야 하고 치료도 받아야 한다. 엄마의 건강 염려증 덕분에 자식들은 한 걱정 덜고 태평하게 살고 있으니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아직 엄마가 건강하게 살아계시다는 건 단순히 감사함을 넘어 나에게도 앞으로 잘 살아야 할 목표이자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즐거운 기억들을 더 남길 수 있고, 더 좋은 세상에서 한 세상 즐겁게 살다가는 후회 없는 마지막을 맞이할 시간이 나에게 아직 남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알면 뭐 하냐고? 당장 오늘이라도 뷰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해도 좋으련만 오늘의 나는 또 내일의 나에게 미루고 있다. 입만 살아가지고... 말로야 별도 달도 다 따줬을 거다. 엄마의 바람은 그냥 딸들과 소소한 추억 나누는 걸로도 충분할 텐데, 거창한 계획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직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내년 엄마의 생신에 맞춰 딸은 엄마와 넷이서 여행을 가려고 한다. 어디가 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어딘들 어떠랴, 

 

 네 여인이 쪼로미 앉아 다리를 일렬로 늘어 세우면 누구의 다리인지 미세한 주름과 굻기 정도로만 파악이 가능할 정도로 세 딸은 엄마 유전자를 많이 물려받았다. 모델 핏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발가락, 손가락이 있고, 남들에게 많이 베풀고 살지는 못하지만 해가 되지 않는 적당한 인성을 타고났다. 내 일흔의 모습이 지금의 엄마라면 나는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다. 함께 늙어가되 내가 먼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그 좋아하던 술도 완전히 끊었다. 내가 술을 끊었다고 했더니 아빠는 "왜?"라고 하셨지만 말이다. 문디나그네ㅎ

몇 번째인지 이제 헤아릴 수도 없는 엄마가 해 준 밥을 먹으며 이 밥을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 자식들에게 기꺼이 밥 한 끼 차려줄 수 있는 건강한 엄마를 좀 더 보고 싶다. 그게 엄마의 큰 낙이며 즐거움인걸 이제 알기에.. 

"나는 치매 걸리면 확 혀 깨물고 죽어뿔끄다. 그래는 안 살끼다."

암도, 치매도, 그 어떤 사건 사고도 피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나에게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할 수 없다. 우리 엄마만큼은 곱게 늙고, 당당하게 지금처럼 사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녀를 꼭 닮은 딸들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다 자립하고 나면, 늙은 세 딸과 더 늙은 엄마는 친구처럼 지낼 수 있겠지? 그날을 기다리기도 하면서 조금 천천히 와도 된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누구에게나 늙는다는 건 반갑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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