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은 간밤에 잠을 설쳤다. 오랜만에 그놈 얼굴을 꿈에서 만났다. 시영은 눈뜨자마자 찬물부터 뒤집어썼다. ‘잊을 만하면 아…. 진짜….’ 컨디션도 별로라 병가라도 낼까 하다가, 그냥 털어내 버리기로 했다. 10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과거. 그래도 살아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녀는 억울한 이들의 죽음을 마주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서 자기를 위로하는 방법을 배웠다.
밤을 엉망으로 보내서인지 오전 나절까지 멍했다. 그녀의 상태를 알아주기라도 한 듯 사건도 없고 조용하다. 시영은 잠시 짬을 내 몇 개월 전 다녀온 교육자료를 보며 혈흔패턴에 관한 부분을 훑어보고 있었다. 막내가 뒤에서 조용히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내용에 흠뻑 빠져 있었다.
“김 주임님, 또 공부하세요?”
“아, 뭐야. 아직 퇴근 안 했어? 재밌지 않아? 혈흔이 튀는 걸로 살해 당시의 정황을 밝혀낼 수 있다는 거 말이야.”
“김 주임님은 과수에 정말 적합한 분인 거 같아요. 저는 너무 힘들어요.”
시영은 막내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왜? 뭐가 힘든데?”
“어젯밤에 부패 변사 다녀왔거든요. 옷에 냄새가 아직도 안 빠졌어요. 볼 때마다 힘들어요. 잠도 잘 못 자고…. 심리치료받으러 가보라고. 저희 팀장님이.”
“심리치료 필요하지. 다녀와! 훨씬 나아. 그나저나 예민한 녀석이 과수에는 왜 지원한 거야?”
“멋있어 보여서요. 와서 보니까 이거 완전 3D 아니, 4D 업종이에요. 시체는 119에서 전부 싣고 가는 줄 알았는데 다 그런 것도 아니고…. 산에서는 왜들 그렇게 돌아가시는지... 김 주임님은 안 힘들어요?”
“나도 힘들지. 안 힘들다고 하면 미친 거지. 나는 말이야. 순경 때 시위 진압하다가 오물 테러받고 표창장 받았어. 그리고, 파출소도 갔다가 여성 청소년부도 갔다가 교통 딱지도 잠시 끊었지. 그러다가, 경제팀으로 갔는데 최악이었어, 나한테는. 그러다가 전부터 가고 싶던 과수로 옮겼지. 거기서 알았어.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의 억울함을 밝혀주는 게 나한텐 더 맞다는 걸. 너 아직 젊잖아. 차차 알게 되겠지. 잘 맞는 데가 있을 거야. 여기도 처음엔 힘들지만 할 만 해.”
“아이고, 이력이 장난 아니네요. 김 주임님도.”
“역마살이 있거든. 그래서, 결혼도 한 번 하고 돌아오고 말이야.”
“에이, 참. 요즘 이혼이 뭐라고. 참, 제가 정말 좋아하는 형님 한 분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이쪽 일은 아니지만, 법조계 쪽이고 훈남이에요. 결혼도 안 했고.”
“아서라. 나 서울 있을 때 연하 놈이 좋다고 하도 만나달라 그래서 몇 번 만났다가 그 엄마라는 사람한테 오지게 당했어. 이혼녀 주제에 어디 감히! 드라마 못 봤냐? 내가 그 뒤로 연애는 끝이야! 퇴근하셔, 얼른.”
막내는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시영은 처음 영안실 앞에서 공황 발작으로 쓰러졌던 일이 생각났다. 시영은 다시 보던 교재로 눈을 돌렸다.
조용한 날은 하루도 없다. 잠시 집중할 틈도 없이 출동 신호가 떨어졌다. 시영은 당연하다는 듯 과학수사 조끼를 걸치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현장에서 또 박 형사를 만났다.
“박 형사님, 우리 너무 자주 만나는데요?”
“그러게, 당직 조가 같은가? 그거보다, 여기 한 번 봐.”
시영은 박 형사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집이었다.
“실종 신고 사건인데 강력범죄로 전환되어서 넘어왔어.”
“또 실종이에요?”
“응, 아내가 실종 상태야. 아직 찾지도 못했고. 피해자 통장에서 몇 차례에 걸쳐 돈이 빠져나갔어. 그런데 시골에 있는 작은 편의점에서 인출 한 데다가 온 몸을 다 가리고 있어서 용의자 특정하기가 쉽지 않아. CCTV도 증거가 될 만한 게 없고. 실종팀에서 처음에 단순가출로 생각했는데 남편이 이상하대. 실종신고는 분명 남편이 했는데 날짜도 잘 모르고 횡설수설하는 게 수상해서 실종팀에서 그 사람을 만나려고 몇 차례 연락했는데 지방출장중이라며 차일피일 미룬다나. 아무래도 강력 사건 같다고 우리한테 넘겼어. CCTV 확인해 보니까 2주 전에 장기 출장이라도 가는지 큰 트렁크를 들고 주차장으로 가긴 가더라고. 어제 사건 넘겨받고 전화해 봤는데 꺼져 있어. 차량 동선 파악도 쉽지 않고. 피해자는 집을 나선 흔적이 없고. 감이 오지? 남편이 끌고 나간 트렁크. 집에서라도 뭔가 흔적을 찾아봐야지.
“그런데, 엄청 깨끗한 분들이신가 보네요. 이렇게 깨끗할 수가 있나? 너무 깨끗한데?”
“그러니까. 집에 와서 보니까 더 수상해.”
시영은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다. 김 주임과 팀원들은 집 안 곳곳에 있을지도 모를 증거들을 찾았다. 그리고, 곳곳에 루미놀 반응을 확인했다. 그러다, 김 주임은 한 곳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박 형사님, 여기요. 이 부분만 너무 새 벽지 같아 보이지 않아요?”
박 형사는 김 주임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집 평수에 비해 왠지 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통 이 자리에 소파가 있지 않나?”
박 형사는 집 꾸미는 데에는 젬병이지만 상식적으로 소파를 대부분 어디에 두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데 김 주임은 박 형사의 말은 들은 척도 없이 한동안 뚫어져라 벽만 쳐다보다가 돌발행동을 했다. 말릴 틈도 없었다. 그녀는 과감히 벽지를 잡고 떼어내었다.
“야, 뭐 하는 거야?!!!”
“이런 거 하라고 저 월급 받는 건데요? 정황 증거가 있으면 직접 증거를 찾아야죠.”
김 주임은 아랑곳하지 않고 벽지를 쭈욱 뜯었다. 새 벽지 뒤에 얼룩덜룩한 갈색 자국들이 드러났다. 과학수사팀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루미놀을 뿌리고 푸른색으로 나타나는 부분들을 촬영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혈흔으로 추정되는 부분의 DNA를 확인하기 위해 증거물 수집에 여념이 없었다. 박 형사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급히 남편의 행방부터 추적했다.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이런 젠장 할. 박 형사는 옆에 있던 장 부장에게 물었다.
“장 부장! 남편 차량 이동 확인은 아직이지?”
“네, 쉽지 않네요. 기지국 확인만 했어요. 집에서 끈 상태로 이동한 모양이에요. 강원도에서 어제 마지막으로 잠시 확인됐고요.”
박 형사가 장 부장과 얘기하는 동안 김 주임이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한 번 닦아냈는데 잘 안 지워지니까 아예 벽지로 덧씌운 거 같아요. 그리고, 원래 소파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루미놀의 발광부위가 소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수평하게 나타나네요”
박 형사는 급히 아파트 경비실에서 재활용 수거업체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그리고, 사라진 소파의 행방을 물었다. 2주 전쯤, 해당 호실 번호로 가죽 소파 하나를 수거했다고 한다. 박 형사는 업체 정보를 김 주임에게 넘겨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시영아, 부탁한다.”
박 형사는 김 주임에게 나머지 증거물 확보를 부탁하고, 남편의 행방을 다시 확인했다. 회사에 확인해 보니 출장은 3박 4일의 일정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병가를 냈고, 어제 출근을 해야 하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무단 결근할 사람이 아니라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났나 싶어 회사에서도 걱정하고 있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생활 반응도 확인할 수 없었다. 마지막 그의 기지국이 확인된 곳은 강원도다. 심지어 출장지도 아니었다. 그의 차량은 하늘로 솟았는지 흔적조차 찾기가 힘들다.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박 형사는 숨기로 작정한 사람과 끝이 보이지 않는 숨바꼭질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라진 아내의 행방도 찾아야 한다. 아내 주변인들에게서는 사이좋은 부부였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주변인들은 그들이 현재 실종상태이고 연락두절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착실하고 선한 사람들이며 변고라도 당한 건 아닌지 모두 걱정했다. 실종자는 외동딸이었다. 갑작스런 형사의 방문에 딸이 사라진 사실도 모르고 있던 부모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사위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박 형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만히 생각하던 엄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우리한테도 딸한테도 아주 잘하는 사람이야. 요새 그런 사람 없어. 그런데, 한 달 전인가? 내가 딸 집 근처에 갈 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는데 애 표정이 안 좋더라고. 가만히 살펴보니까 팔, 다리에 멍이 들어있길래 무슨 일 있냐 했더니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넘어져서 멍 들었는데 며칠 아프더니 이제 괜찮다고 했어.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걔가 꼼꼼해서 막 넘어지고 그럴 애가 아닌데.”
“둘이 여행이라도 간 거 아닐까요? 둘 다 연락이 안 된다면서요?”
아버지는 둘이 아주 사이가 좋았다며 아무 일도 아닐 거라 믿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런 아버지에게 ‘따님 집에서 핏자국이 아주 많이 나왔습니다.’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