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성함이랑 주민등록번호, 거주 주소부터 부탁드립니다.”
그는 배영진이란 사람이었다. 최지영보다 4살이 많았고, 7급 공무원이었다.
“최지영 씨와 어떤 사이인가요?”
“사귀던 사이입니다.”
“최지영 씨가 실종된 후 연락을 거의 안 했던데, 실종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지영이에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는 연락이 왔어요. 그리고,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도 전화는 꺼져있고…. 저는 실종됐다는 것도 형사님 연락받고 알았습니다.”
“3개월 전, 최지영 씨 전화기가 꺼진 그날 전후로 그녀와 다투었다거나 그런 사실이 있습니까?”
“전혀 없어요. 마지막 만난 날, 제가 청혼을 했어요. 6개월 정도 만났는데, 이 여자다 싶더라고요. 제 청혼에 지영이가 행복하다며 눈물까지 흘렸는데, 그 뒷날, 갑자기 헤어지자고 문자가 와서 믿을 수가 없었어요. 시간이 더 필요한가? 6개월 만에 청혼은 너무 섣불렀나? 뒷날에야 현실로 받아들이고 당황해서 헤어지자고 하는 건가 싶어서 답답했어요. 헤어지자는 문자 후에 계속 제가 전화하니까 받지는 않고, 이 문자를 보내고 전화기를 꺼버렸더라고요. 마지막 문자가 이거예요. 보세요.”
‘오빠, 이제 그만하자. 그리고, 나 찾지 마. 회사도 관뒀으니까. 나 찾으면 다신 안 나타날 거야.’
그녀는 무슨 이유로 갑자기 그에게 결별을 선언했을까? 배영진의 알리바이는 확실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후, 그는 회사와 집만 오갔다. CCTV 화면에서도 느껴질 만큼 힘이 쭉 빠진 그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용의 선상에서 완전히 배제된 건 아니기에 계속 그를 밀착 감시했다. 한편, 최 씨가 근무한 회사에 가서 친하게 지낸 동료들에게 그녀에 관해 물었다. 직장 내에 원한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에서도 특이한 점은 찾을 수가 없었다. 친하게 지낸 직원들은 남자 친구가 잘해줘서 행복해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로 퇴사한다고 밝힌 뒤에 나타나지도 않아서 그녀의 짐은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모두가 그녀가 살해된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안타까워했다. 박 형사는 답답해졌다. 의심할 만한 용의자가 한 명도 없다. 어디서부터 사건을 풀어야 하나.
“카페인 필요하실 거 같아서요.”
뒤돌아보니 김 주임이 서 있었다.
“깜짝이야. 인마. 내가 사 먹으면 되는데, 사러 갈려던 참이었어. 고마워!”
“젤리 사면서 샀어요. 잘 안 풀린다면서요?”
“너 우리 팀에 프락치 심어 놨냐?”
“저 마당발인 거 아시면서. 헤헤.”
“용의자가 없어. 파라콰트는 10년 넘게 생산 판매 금지 약품이야. 근데 그걸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한 걸까?”
“변사자 주변에 농사랑 관련된 사람은 없어요?”
“어머니가 경기도 쪽에 사신다고는 했어. 아직 거긴 안 가봤고. 최지영 씨 집이랑 주변 탐문부터 우선 하던 중…. 아! 시영아, 고맙다. 지금 거기부터 가 봐야겠다.”
박 형사는 시영이 건넨 커피를 들고 팀원들과 바쁜 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최지영의 어머니가 사는 곳은 경기도 외곽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고 노모 혼자 거주하는 작은 집이었다. 박 형사는 노모에게 최 씨와 관련된 것들을 조심스레 물었다. 딸을 잃은 늙은 어머니는 그녀의 착함과 효심을 끝없이 얘기했다. 한참을 노모의 슬픔을 달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라목손이 집에 있는지.
“그거 창고에 조그만 거 하나 있나 몰라. 십 년도 넘었지 아마, 나라에서 나와 가지고, 다 갖고 갔는데 그때 바깥양반 살아계실 때거든. 하나는 놔두자 그래서. 놔뒀지. 그런데, 둘 다 늙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니 쓸 일도 없었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요?
박 형사는 노모에게 위치를 물었다. 자기도 안 본 지 오래라 거기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대충 창고 안을 가리킨다. 하지만, 존재감이 있어야 할 초록색 그라목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머님, 혹시 아버님은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까?”
“아니, 혈압이 조금 높은 거 말고는 딱히 없었어. 며칠 토하고 하더니, 갑자기 가버렸어. 심장마비로.”
박 형사는 급히 전화를 걸었다.
“장 부장, 최지영 씨랑 부친 보험 가입 좀 알아봐! 지금 바로.”
박 형사는 조사실에 앉은 두 사람을 유리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참고인 자격으로 임의 동행했다. 그들은 단순히 참고인 조사인 줄 알고 있다. 6시간 안에 자백을 받아내야 구속 영장을 신청할 텐데…. 자신들이 용의 선상에 오른 걸 알게 되면 경찰서를 나서자마자 숨어버릴 것이다. 이렇게까지 일을 진행시킨 걸 보면 철두철미한 데다 인간적인 면은 기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부장, 남자는 자네가 맡아. 따로 하자고.”
박 형사는 조사실에 앉은 여자에게 말했다.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불러주세요.”
그녀는 술술 대답했다.
“사망한 최지영 씨와는 어떤 사이시죠?”
“제가 언니예요. 형사님, 왜 또 불렀고, 다 아시면서 왜 물어보시죠?”
“정식 참고인 진술 절차예요. 같이 오신 분은 어떤 사이이신지?”
“사생활까지 말해야 하나요? 같이 오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저희가 왜 조사를 받아야 하는 건지. 지난번에 다 물어보신 거잖아요.”
“그때 놓친 게 있더라고요. 최지혜 씨, 보험 설계사시더군요.”
“그게 제 동생 사건이랑 무슨 상관이죠?”
“아버지 사망보험금이랑 동생 사망보험금 수령인이 최지혜 씨로 되어있던데, 아버님 보험금은 이미 받으셨고…. 동생분 보험금도 장례 치르자마자 바로 신청하셨던데 맞습니까?”
“제가 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도와준다고 가족들이 들어준 거죠. 수익자로 정할 사람이 마땅히 없으니, 제가 된 거고, 사망했으니 신고한 거고요. 그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죠?”
박 형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말을 이었다.
“어머님 댁에 있던 농약병 하나가 사라졌어요. 혹시 보신 적 있나요?”
“농약병이라뇨?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박 형사가 사망자의 언니를 조사하는 동안 다른 팀원들과 과학수사팀은 최지혜가 동거남과 살고 있는 집을 수색했다. 화장실 맨 위 선반에서 박카스 병에 담긴 초록색 액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사망한 최지영 씨의 핸드폰도. 수건으로 돌돌 말아 자연스럽게 은폐시키려 했지만, 김 주임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 주임은 박 형사에게 메시지로 현장에서 확보한 것들을 사진으로 보내주었다.
박 형사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장 부장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피의자 심문에 들어간다.
“이 시각부터 최지혜 씨는 최지영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신분이 변환되었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다 녹음될 것이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말을 하지 않을 권리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박 형사는 그녀에게 미란다 고지를 하고, 본격적인 심문에 들어갔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다음 순번은 어머니입니까? 이제 남은 가족은 어머니밖에 없잖아요?”
그녀는 입을 닫았다. 눈빛은 당당했다. 어이없어서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 집에서 발견된 박카스 병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시죠.”
그녀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좀 전까지 당당했던 눈은 어느새 갈 길을 잃은 듯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입은 열지 않았다. 반대로 옆 방에 있던 그녀의 동거남은 그렇지 않았다. 동맹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최지혜가 다 시켜서 한 거다. 파라콰트라는 건 들어본 적도 없고, 그녀가 전화로 불러서 가보니 동생이 차에 쓰러져 이미 죽어있었다. 그녀가 1억을 자기에게 준다고 해서 야산에 같이 유기만 했다.’라며 그녀가 왜 죽었는지 자신은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날의 일에 관해 물으면 돈 돌려내라고 화를 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고 했다. 박카스 병에 관해서도 물었으나,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했다. 아마 최지혜의 동거남은 박카스 병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그도 모르는 사이 그는 사망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수익자는 최지혜였다. 다음 희생자는 동거남 자신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리석은 사람.
최지혜의 차에서 사망자 최지영의 DNA와 파라콰트 성분이 검출되었다. 사망자의 토사물이 남아 있었다. 깨끗하게 세차도 했고, 시간도 석 달이 넘게 지났으니 안심했을 것이다. 임의동행에서 구속 상태로 바뀌자, 그녀는 자포자기했는지 모든 걸 털어놓았다. 최지영은 아버지가 바람피워 데려온 동생이었다. 그럼에도 어릴 때부터 착하고 순해서 엄마가 유독 예뻐했단다. 아버지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고 했다. 그러던 중에 창고에서 그라목손을 발견했고, 아버지가 드시던 다슬기국에 한 숟갈 넣었는데 일주일 만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망보험금을 수령했다. 아버지가 죽으면 모든 원망이 사라지겠지 생각했는데, 동생이 능력 있는 남자에게 프러포즈받았단 소리를 듣고 샘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며, 그제야 눈물을 보였다.
“몇 년 받을까요? 그 언니 말이에요.”
편의점 밖 의자에 앉아 젤리를 씹다 말고 김 주임이 박 형사에게 물었다.
“언니라니 최지혜? 아버지 사건은 증거불충분으로 제외될 거고, 구치소에서 매일 반성문 제출하고 있다더라고. 검사야 무기징역 구형하겠지만, 재판부에서는 글쎄다.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고, 뭐 이런저런 양형 사유를 들어서 감형하겠지. 법이 너무 약해빠졌어.”
“저기, 박 형사님…. 배영진 씨 기억하세요?”
“응, 기억해. 피해자 남자 친구. 7급 공무원. 갑자기 그분은 왜?”
“투신했어요. 살던 아파트에서. 저희 관내가 아니라 저도 전체 사건 뜨는 거 보고 알았어요. 자살로 종결됐고요.”
박 형사는 절절하던 그들의 메시지를 봤다. 서로 너무 사랑한 커플이 언니의 시샘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누구에게 이 억울함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 법이라는 게 과연 이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줄 수 있을까? 둘은 이제 하늘 그 어디선가 다시 만났을까? 박 형사는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할 길이 없었다.
“저더러 감정 이입 하지 말라면서요? 박 형사님 곧 울 거 같은데?”
“갱년기인가, 요즘 힘드네. 얼마 전 여중생 피살 사건도 그렇고.”
“갱년기 올 때 됐지. 곧 오십이잖아요? 왜 연우한테 늘 지는지 아세요? 갱년기 엄마는 사춘기 딸을 이기는데 갱년기 아빠는 못 이긴대요. 울 엄마가 그랬거든요.”
“하하하, 나 참, 너도 곧이야, 인마. 너는 싸울 딸 없어서 좋겠다.”
“지금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나. 남편 욕심은 없는데 아이 욕심은 있어요. 근데 또 키울 자신은 없고. 그래서 고양이만 키웁니다. 아, 얼마 전에 30대 남자가 마약하고 서부경찰서 와서 칼 휘두르는 바람에 경찰 두 분 다치셨어요. 세상이 점점 미쳐 가는 거 같아요.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CCTV가 곳곳에 있어서 웬만하면 다 잡히니까 연쇄 범죄는 줄어드는데 신종 범죄가 자꾸 생겨요. 갈수록 힘드네요. 정년까진 해 먹어야 하는데.”
“난 정년 채우면 미련 없이 떠날 거야. 혼자 어디 시골 가서 살아야지.”
“제~발, 감자 같은 거 보내지 마세요. 몇 년 전에 저희 팀장님 은퇴하고 시골 가시더니 매년 감자랑 고추랑 호박이랑 아휴.”
“하하하, 시영이 집에만 보내야지. 하하하.”
둘은 한참을 웃었다. 그들이 사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시시껄렁한 잡담이 최고였다. 해결된 사건들은 그나마 이렇게 보내줄 수라도 있는데……. 박 형사는 마음 한편에 짊어진 돌덩어리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