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사는 게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
새해 액땜을 하려는지 삐고 탈 나고 데고... 온몸에 상처투성이다.
산에서 내려오다 다쳤음 그러려니 할 텐데 멀쩡한 주차장 평지에서 발목이 기역자로 꺾여버렸다. 일주일 가까이 시퍼런 멍 양말을 신고 그러고도 신나게 산을 다녔다. 병원도 안가고 뭐 이 정도쯤이야.. 참고 다녔다. 이딴 일로 무너지고 싶지 않다는 기도 안 차는 배짱? 똥고집도 있었지만 혼자 등산 가는 남편 등이 외로워 보여서 말리는 남편에게 아무렇지도 않다고, 안 아프다고 안심시켰던 거 같다. 다행히 덧나지 않고 지금은 괜찮으니 결론은 잘 참았던 셈이다.
그렇게 멍이 사그라들 때쯤 마트에서 사다 먹은 멍게에 문제가 있었나 보다. 해산물 좋아하는 날 위해서 남편이 산 멍게였다. 물론 그는 끄트머리만 먹어서 살아 남았고 장염은 오롯이 나에게만 왔다. 이튿날부터 구토에 설사, 오한, 근육통 뭐 코로나 저리가라로 며칠 아프고 났더니 3킬로가 빠지고 회복이 안된다. 한끼도 못 먹으면서 그 와중에 아이들 고기 먹이겠다고 굽다가 불판에 데고.. 이 정도면 울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 각인데ㅎㅎ손주보다 사위보다 당신 딸이 우선이실 텐데. 아플때 무슨 지지리 궁상이냐고 말이다.
"참고 살지 말고 아프면 아프다 하고 하기 싫을 땐 그냥 쉬어!!!"
늘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늙어도 엄마 말 안듣기는 똑같다. 예전엔 참는게 미덕이었을지 몰라도 시대가 바뀌었다며 이제 곧 칠십인 엄마도 나보단 더 신세대스럽다.
불면증으로 치료받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갈 때마다 약이 조금씩 늘어간다. 물론 선생님은 후유증이 없는 약들이니 걱정하지 마라, 수면제도 아니다, 불안과 스트레스를 낮춰주는 약들이라며 안심을 시켜주신다. 그러면서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릴 때는..'이라고 말을 아끼시며 혹시 털어놓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묻는다.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혼자만의 걱정거리가 있다면 절대비밀보장이라고 계속..(넘어갈 뻔했다. 이 선생님 보통이 아니다)
그러면서 제발 웃지 마라고. 자기는 상담하면서 웃는 분들이 가장 무섭다며. 참는 게 다가 아니라고 다음번엔 아무 얘기라도 속에 있는 걸 털어놓으라고 신신 당부하시며 말이다.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한계점을 지나 더 이상 담을 수가 없으니 탈이 난거라고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밖으로 다 빼내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제대로 된 내 얘기를 털어놓지 못하고 있다.
습관과 성격도 무시할 수 없을 테지만 나 아니면 이 집은 안된다라는 생각이 나를 더 강압적 책임감 속으로 밀어 넣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프면 안 되고 누구보다 늦게 자고 먼저 일어나야 했다. 세 아이 독박육아, 불같은 성격을 가진 남편 감정쓰레기통 역할에 자주 아프시던 시댁 어른들까지 다 내 몫이었다. 그렇게 20년 살다 보니 자연스레 참는 게 익숙해졌다. 그렇다치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여성들이 다 불면증에 우울증이어야 하는데 내가 소심하고 약해서 그런건지도 모른다.
그릇이 작은데 큰 척하며 살았으니 위험하게 찰랑찰랑대다가 이제 흘러넘치는 거다. 참는게 능사가 아니라는걸 몰라서도 아니고 할말은 하고 살았어야 했는데 그러면서 싸움이 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보니 늘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불면증은 십여년 전에 있었어야 했다.
이제 와서 굳이, 편안하게 안정된 지금, 왜 불면증이 시작된걸까? 어쩌면 내 존재가치가 조금씩 줄어드는데 대한 불안감일까? 순간 순간 욱하던 남편도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해지고 있고, 아이들은 착하고 이제 내 손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늘 내 편이셨던 시아버지도 이제 없다. 그런 각종의 상실감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아니면 가정주부로서의 열등감인가? 많은 추측들을 해보지만 대다수가 겪는 일에 혼자 민감한가 싶어 이제와 지난 날들을 들추어 낼 용기가 쉽사리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처럼 어디에라도 풀어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자려고 누우면 그 동안에 억울했던 것들이 스멀스멀 내 머리 주변으로 몰려든다. 한 녀석이 사라지면 다음 녀석이 자기 차례라며 디밀고 나온다. 그렇게 릴레이로 잡스러운 녀석들이 지나가고 나면 잠 한 숨 못 잔 채 아침이 되어버리는 그런 야속한 밤들이었다. 수없던 내 속에 화가 이미 종유석처럼 내 몸과 하나가 되어 붙어버렸다. 떼어내고 나면 매끈해질텐데 떼어내는 그 과정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지금 회피하고 있는 중이다.
"기질자체가 걱정과 불안에 대한 정도가 높은 분이신 데다가 모든 걸 참고 사시는 분인 거 같아 보여요. 각성 상태가 강해서 그 불안의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치료가 쉽지가 않으니 제발 다음엔 얘기 좀^^.....그렇게 하나씩 꺼내셔야 해요. 아시겠죠?!"
"네~^^;; (그러려면 이혼이 제일 빠른 방법일텐데ㅎㅎㅎㅎ)"
"그만 좀 웃으세요!!"
"네^^;;; 죄송해요.(그렇다고 이제와서 이혼할 수는 없잖아요ㅎㅎㅎ)"
정신과에 다니면서 내 마음부터 건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심리학책들을 찾아보고 있다. 열 권 가까이 이 읽었지만 아직 내 담당 선생님만큼 내게 와닿게 얘기해 주는 심리학자가 없다. 불안할 때 심리학이란 책을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은 효과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반권가까이 읽었지만 아직^^;; )
"답답하게 살지 마~ 하고 싶은 거 있음 하고, 하고 싶은 말 있음 하고!! 참는다고 알아준다고? 절대 그렇지 않아!"
약을 먹지 않아도 잠을 잘 자게 되는 그 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사회규범, 질서 등등 꼭 참아야 할 것들은 참아야 하는게 당연한 일이니 초딩적 사고를 가진 분들은 이번 기회에 좀 참아보시길 바란다)
사진출처 © fairytailphotography,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