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27일
머리를 깎기 위해 오랜만에 신촌에 갔다. 신촌은 20대의 내 삶의 바운더리였고 젊은 시절의 추억이 많이 깃들어 있는데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잘 가지 않게 된다. 그래도 학교 앞에 있는 미용실을 10년 넘게 다니고 있어서 한 달에 한 번은 어떻게든 학교를 가게 된다.
학교에 주차를 하려고 보니(학교에서 동문들을 위해 주말과 공휴일에 5시간 무료주차 서비스를 제공해줘서 학교에 주차를 하게 된다) 마침 하계 졸업식 날이었다. 졸업을 축하하는 플랜카드들이 걸려있고, 정문 앞에는 꽃다발을 파는 상인들이 있는 모습은 여느 졸업식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지만 역시 코로나 시국의 졸업식이라서 그런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졸업식의 풍경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입학하기 어려운 학교에 들어오느라 고등학교 내내 고생하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4년 동안 여러 친구들, 선후배들과 많은 추억을 남겼을 텐데 코로나로 인해 마음껏 축하를 받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는 졸업생들의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졸업생들이 추억이 깃든 학교의 여러 장소에서 가족끼리 조촐하게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예전의 내 졸업식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 졸업식은 2006년 2월 27일이었다. 졸업식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날이 내 생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일이자 졸업식이었던 그날은 지금은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한 동안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난 2004년에 사법시험 1차 시험을 합격했고, 내 계획대로 였다면 2005년에 2차 시험을 합격하고 졸업을 할 예정이었다. 시나리오대로만 되었다면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해서 법과대학생이 바라는 최고로 성공적인 졸업을 할 수 있었다(참고로 사법시험은 1차 시험을 합격하면 2차 시험을 두 번 볼 수 있고, 보통 두 번째 보는 2차 시험에 합격을 하면 성공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2005년에 사법시험 2차 시험에 불합격했고 그렇게 재학 중 합격하고 졸업하려던 시나리오는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원래 2차 시험에 두 번째(재시)만에 합격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어서 재학 중에 합격하고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졸업식을 3일 앞두고 본 2006년도 사법시험 1차 시험이었다. 사법시험 1차 시험은 객관식 시험이고 시험이 끝나면 답안이 나와서 곧바로 채첨을 할 수 있다. 시험을 보고 집에 와서 방에 들어가서 채점을 했는데, 다른 과목(헌법, 민법, 선택과목인 형사정책)은 다 잘 봤는데 형법 과목에서 반타작을 했다. 나는 지금껏 모의고사에서도 그런 점수(50점)를 받아본 적이 없었고, 2004년에 1차 시험에 합격할 때에는 형법에서 1개밖에 틀리지 않아서(총 40문항이고 1문항당 2.5점이니 97.5점을 받았었고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고득점이었었다), 처음에는 채점을 다른 유형의 답안으로 한 줄 알았다. 뭔가에 홀리지 않았다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점수였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채점을 해봐도 같은 점수가 나오자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깨달았다.
형법을 반타작했다는 것은 이번 해 1차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 말은 2006년에는 2차 시험을 응시할 수 없다는 것, 즉 속칭 해걸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뒷바라지를 해주신 부모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고 방에서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채점하러 들어간 방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자 엄마가 이상함을 감지하셨는지 방으로 들어오셨고 엄마 얼굴을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시험을 보고 운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문제는 3일 후에 있을 졸업식이었다. 몇 달 전 2005년 사법시험 2차 시험 발표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졸업식에 대한 온갖 행복한 상상을 하곤 했었는데, 1차 시험을 망치고 해걸이가 확정되자 부모님을 졸업식에 모시고 갈 면목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졸업식에서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며칠 전에 치른 1차 시험 이야기가 나올 거란 생각에 졸업식에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 정도 고민하다가 그래도 날 대학에 보내려고 부모님이 무척 고생하셨는데 졸업식에 참석을 하지 않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참석을 하기로 했다.
지금은 로스쿨이 도입돼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법과대학 졸업식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 있었다. 졸업식에 참석한 사람은 두 무리로 나뉜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졸업 직전에 본 사법시험에서 불합격하는 경우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졸업하는 모두가 축하를 받고 서로 축하해 주어야 마땅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참으로 안타까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내 대학 생활의 마지막 통과의례였던 졸업식은 가급적 사람들을 많이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하고 행복하게 졸업하는 동료들에 대한 부러움과 부모님에 대한 죄송한 마음으로 점철된 채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을 했다고 해서 그 이후의 삶도 성공적이거나 더 행복한 것도 아닌데 그때는 그런 것에 왜 그렇게 신경을 쓰고 집착을 하면서 스스로를 불행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게 까지 슬퍼할 일들이 아닌 것들에 대해 그때는 왜 그렇게 아파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때 아파했기에 그런 아픔을 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더 노력했고 그 결과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다.
마침 졸업식이 있던 날 학교에 간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 하나를 또 이렇게 끄집어 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