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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한 여행자 May 02. 2020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슬기로운 생활> 사이의 괴리

다른 사람의 인생의 무게를 대신 짊어지고 사는 삶

한동안 코로나 때문에 휴일에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관계로 그동안 못 봤던 드라마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쉴 때 책을 참 많이 봤던 것 같은데, 서류와 기록 같은 것을 많이 보는 직업을 가져서 그런지 몰라도 언제가 부터는 쉴 때는 글자를 별로 보고 싶지 않아 영상물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다.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는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의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다. ‘율제병원’이라는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99학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기 5명의 이야기이다. 내가 99학번이어서 그런지, 그리고 나도 대학교 때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대부분 나처럼 변호사로서 같은 직역에 있어서 그런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공감이 많이 된다.


드라마가 주인공들의 현재의 삶과 과거 대학교 시절을 오고 가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보니 보고 있으면 예전 대학교 시절이나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때의 생각도 많이 난다. 드라마에서의 주인공들처럼 대학교 시절에 만나서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아직도 대학교 시절 그대로인 것 같다. 나이가 들고 업무적으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수록 이런 ‘친구’들을 만나면 참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출처 : TVN 홈페이지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아무래도 종합병원 의사들의 생활이다. 의사인 친구들에게 이야기는 많이 듣긴 했지만 사람이란 게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이해와 공감의 정도가 떨어지는 관계로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힘들면 또 얼마나 힘들려고.”, “그래도 금전으로 보상을 많이 받잖아.”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것 같긴도 하다.


수술이 잘못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책임자로 있다는 것의 무게, 응급콜이 떨어지면 쉬거나 사람을 만나고 있다가도 급히 수술하러 가야 하고 실력이 뛰어나면  편한 것이 아니라  부담스럽고 리스크가  수술이 맡겨지는 생활. 아마 이런 생활 때문에 드라마에서 학창 시절에    놀면서도 공부도 잘했고 현재는 수술도 잘하면서도 대인관계도 좋은 직업적, 사회적 관점에서   모든 것이 완벽한 이익준(정석) 와이프가 친구와 바람이 나서 이혼을 당하고, 역시 의사와 교수로서는 완벽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채송화(전미도) 역시 남자 친구가 바람이 나서 헤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고 있자면 나도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한 두 번 경험할까 말까 하는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퇴근하고 쉬는 동안이나 심지어 잠을 자면서 조차도 머릿속으로는 고민을 하게 되고, 휴가를 가서도 급한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해서 항상 노트북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처리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한편으로는 공감이 많이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난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의사는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종합병원 의사를 하게 되면 내 성격에 비춰 볼 때 늘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약해져 일찍 죽을 것 같기도 하다.


아크로폴리스에서도 급한 업무 전화가 오면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는 삶을 살다 보면 정작 내가 겪는 인생의 문제들은 그 사람들이 겪는 문제들에 비해선 사소하고 하찮게 느껴지는 경향이 생겨서 내 문제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전 재산을 잃을 수도 있는 사건을 맡아서 하다 보면 내가 주식에서 잃은 몇 천만 원 정도는 인생에 있어서 그리 큰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고 심지어 당사자에게 있어 정말 절박한 사건을 하다 보면 내 인생에서 조금 불운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금 이 사람이 처한 문제만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이런 삶의 태도가 내 인생에 있어서는 쓸데없는 걱정과 고민을 하지 않도록 해주어서 한편으로는 좋긴 하지만, 그러다 보면 정작 나와 내 주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상황들을 쉽게 간과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매달려서 온 신경을 쏟고 있다 보면, 정작 나와 관련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 그들과 인생의 시기에 맞춰서 결정해야 하는 일들을 미루게 되고 그 사이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나의 무관심으로 인해 외로워하고 힘들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런 외로움은 내가 고민하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인생에 있어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들에 비하면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고, 그 정도 외로움과 힘듦은 스스로 견뎌줬으면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나의 입장을 눈치챈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서히 내 일에 방해가 될까 봐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되고(아마 나한테 몇 번 이야기해본 후에 이야기를 해봐도 별로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한계에 다다르면 나를 떠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일을 하고 나서부터는 내가 맡아서 해결해야 하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있어 벌어진 큰 일과 나와 관계된 사람과의 사이에 있어서의 일 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에 대해서 늘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내 인생이 중요한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인생이 중요한지만 놓고 보면 나와 관계된 일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내가 맡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벌어진 일들의 경우 해결해야 할 시기를 놓쳐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급박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결국 대부분의 선택을 내 일 보다는 나에게 맡겨진 그 일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하는 일에 대해 무척 보람을 느끼면서도(정말 어려운 사건을 힘들게 해결한 후에 의뢰인으로부터 감사인사를 받을 때면 내가 마치 슈퍼히어로라도 된 느낌을 받는다) 가끔은 이런 직업을 같게 된 것이 조금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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