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

by 설다람

1.

영화 보이스카웃을 보면, 방금 전까지 안방 침대에서 아내랑 자고 있던 놈이 옷장에 숨어있고, 남편은 총을 들고 옷장을 겨누며, 저 안에 있는 놈이 누구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샤워한 흔적이 있는데, 네 머리를 안 젖었어. 저 안에 있는 놈 누구야. 미친 소리 좀 하지 마. 셋 셀 동안 안 나오면 쏠 거야. 하나, 둘,

옷장 문이 열리고, 남편이 일하는 탐정 사무소 사장이 두부를 마흔 개는 먹은 듯한 표정으로 나온다. 밖으로 나가 배에 묵직하게 주먹 한 방을 먹이긴 하지만, 화내진 않는다. 사실 오래전부터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캐묻지도 않았었다. 그런 남편을 보고 아내가 ‘야, 넌 배짱도 없냐. 그러고도 내 남편이야’라고 다그친다. 다그칠 사람이 뒤바뀐 것 같지만,

평소처럼 사건을 받는다.

평소처럼.


2.

아내도 없고, 방금 전까지 안방 침대에서 아내랑 자고 있던 놈이 옷장에 숨은 상황을 겪어본 적도 없어서,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기분일지는 알지 못하지만, 화를 내지 않고, 나가서 평소처럼 일을 받기로 선택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어떤 기분일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귀찮은 것이다.

화낸다고 아내가 다른 사람이랑 자지 않은 것이 되지 않는다. 엿 같긴 하지만 사장을 두들겨 팬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열불내고 난장판 만들 시간에 부엌으로 가 시리얼을 타 먹는 게. 낫다. 아침은 짧다. 하루를 온전히 다해내기도 힘든데, 이미 일어날 일에 힘 쏟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길을 걷다 떨어뜨린 케이크를 어떻게든 다시 주워보려는 바보는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평범한 추락에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일까.

아, 한 가지라면 이해가 간다. 헤어지기 싫어서. 놓칠까 봐. 그게 이유라면 설득력 있다. 머리카락 한 올 정도의.


3.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존중받고, 존중해주는 관계는 인간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따분함을 이겨내기에는 부족할 때가 있다. 따분함보다 생명력이 질긴 감정은 드물다.

반대편의 나와 손가락 인사를 하면서 완전히 겹쳐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손가락이 손가락을 파고들 때, 원자 안의 빈 공간들이 서로 엇갈리며 틈 없이 완전히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필요한 감각들을 꿈에서 채취하곤 한다. 지하철에 음 소거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과자들은 왜 건강한 척을 하려는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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