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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는 라선을 데리고, 세안나는 사내 의원으로 갔다. 상태를 살피려는 의사에게 라선은 조금만 쉬면 된다고 말하고 곧장 휴게용 침대로 가서 누웠다.
"콧대 높은 사장들이 갈구기라도 했어요?"
"아뇨, 그냥 좀 긴장이 풀려서."
라선이 여린 웃음을 지었다.
"CTO 미팅은 얄짤없던데요, 어떻게 여기 다니다 잘렸는 거 알고, 꼬투리 잡는데, 나중에는 뭐 코딩 테스트라도 시킬 기세였어요."
"세안나가 고생이었네요. 혹시 다투거나 하진 않았죠?"
"걱정 마세요. 상냥하게 응대했으니까. 라선 덕분에 독 많이 빠졌어요."
세안나는 괜히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순간에 한 사람은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라선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어 보였다.
"힘들면 좀 제대로 쉬어요."
말대신 라선은 눈웃음으로 답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푹 쉬고 내려와요."
"고마워요."
커튼을 쳐주고 세안나는 사내 의원을 나왔다. 정말이지, 자기 몸 하나는 제대로 못 챙기는 사람이라고, 세안나는 생각했다.
그날도 라선은 반쯤 접힌 정신으로 집에 갔다. 다음날 반쯤 잡힌 정신을 억지로 펴고 출근했고, 다시 다 쓰러질 듯한 몸으로 돌아왔다. 치료를 받았지만,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효과가 좋다는데, 그 효과를 모두 피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그 와중에 중도금 입금 일자가 되었으니, 송금해달라는 문자가 왔다.
라선은 9억 6천만 원을 보냈다.
흔들리지 말자. 새로운 집에서, 새 브랜드도 론칭하고, 모두 잘 마무리할 것이다. 반드시 호전될 것이다. 잘 해왔으니까, 잘 할 것이다.
각오와 같은 믿음은 1차 치료 후 결과를 확인한 의사의 소견으로 무너졌다.
"종양 크기가 보시는 것처럼 조금 커졌습니다. 표준치료가 잘 들지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2차 투여를 통해 경과를 살펴보기에는 현재 환자 분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담담한 어조로 의사가 말했다.
"그럼 죽으라는 건가요?"
극단적으로 라선이 반응했다.
"글로피타맙 계열로 약제를 바꾸거나, CAR-T 치료를 시도하는 방법이 있는데, 둘 다 시간이 소요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CAR-T의 경우엔 1회 투약으로 치료를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그걸로 진행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 잘못된 약 투여해서 2주를 버린 건가요. 교수님께는 그냥 지나가는 2주일지 몰라도, 저한테 2주는 마지막 14일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흥분한 라선이 분노를 쏟아냈다.
"CAR-T는 고비용에, 상대적으로 절차가 복잡해, 대개는 다른 치료법이 실패한 후 선택지로 고려합니다."
"대체 얼마 기에요?"
"대표적인 약물로 라팔리아가 있는데, 1회 투여에 5억 정도 합니다."
말문이 막혔다.
"산정특례를 적용해도 5억인 건가요?"
"안타깝게도 림리아는 아직 산정특례 대상에 심의 중에 있습니다."
5억? 지금 5억을 내면 잔금을 치를 수 없다.
"완치율이 몇인가요?"
"통상적으로 약 33%입니다."
잔금을 치러서 집을 매수할 수 있는 확률은 100%이다. 그런데 33%를 믿고 12억을 버리고 치료를 받는다... 그래 돈보다 목숨이 소중하다. 혈연도 없이 죽는 마당에 남은 돈을 치료에 쓰는 게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혈연도 없이 죽는 마당에,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집을 가진 채로 죽는 것이 그릇된 선택이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다.
판단의 골목을 서성이다 라선이 말했다.
"조금 더 생각하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너무 늦지 않게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번 치료가 들어가면 입원하셔야 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정리할 준비하시는 걸 권장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료실을 나오고 나서, 라선은 화장실로 가 변기에 구토했다. 늦지 않게 들어오지 않았다면 바닥을 더럽혔을 것이다. 욕도 나오지 않았다. 기적은 없다. 돈은 바닥에서 샘솟지 않는다. 병이 실시간으로 몸을 갉아먹고 있다. 나을 수 있을까. 손에 힘이 풀렸다.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다시 힘이 풀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발을 헛디뎠다. 차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라선은 운전자를 노려보았다. 공연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누구에게라도 화를 내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는 대신 계속해서 걸었다. 세 시간을 걸었을까, 어느새 매주 오리엔탈드래곤펠리체를 보러 돌았던 코스를 걷고 있었다.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놓쳐야 한다고?
라선은 아파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송호대교로 올라갔다
집 없는 채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혼자 죽는 것, 치료를 받지 않고 본인 명의 집에서 혼자 죽는 것. 어느 쪽이 더 비참한지, 저울질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세상아.
헛웃음이 났다. 그때와 똑같았다. 완전히 홀로 선 기분. 바람에 뺨이 아렸다.
“이번에는 안 잡아줄 거야.”
어느새 옆에 민하가 와 있었다. 민하는 라선과 같은 방향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 잡아줘도 괜찮아요. 혼자서 충분하니까.”
라선은 난간을 잡고 넘어간 뒤, 등을 난간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떨어질 것이다.
"그러다 죽어."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며 민하가 말했다. 검은 고양이가 민하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라선의 머리카락이 펼쳐졌다. 추위에 뺨에 붉은 자국이 번져 있었다. 미세하게 몸이 흔들렸다. 호흡이 가빠졌다가, 가라앉았다. 발을 조금 옮겼고,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비명 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라선은 세상을 향해 고함쳤다.
"내가 질 것 같냐!"
후련하게 한 번 더 악 소리를 내지르고 라선은 난간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죽긴 누가 죽어요. 곧 죽어도, 절대 안 죽어요.“
쨍한 미소를 지으며 라선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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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담보대출을 최대 한도로 받을 예정이었기에, 금융권에서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 개인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먼저 손을 벌렸을 테다. 하지만 라선에게는 누구도 없었다. 아는 사람 중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을 찾아서 빌어보자. 돈이 많다고 5억을 적은 돈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여윳돈의 규모가 남들과는 다르니, 빌려줄 능력은 충분할 것이다.
연락처 목록을 내리던 라선은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자산이 많을 것이라 예상되는 한 명을 발견했다. 리코였다. 넥스테이트에서 엑시트를 했고, 이번 넥스노트 인수합병 건으로 투자금을 몇 배로 회수했다. 어쩌면 금융 소득만으로 연 1억을 벌고 있을지도 몰랐다. 최대한 공손한 어투로 라선은 상황을 정리해 만남을 요청하는 문자를 리코에게 보냈다. 몇 시간 뒤 전화가 걸려왔다.
-몸 움직이기 힘들 텐데, 전화로 얘기하죠. 심란하시겠어요.
"마음은 그렇다 쳐도, 문자 드린 대로 돈이 문제죠.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혹시 매수하셨나요?"
-아직 보고 있어요.
”제가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을 매수할 예정이에요. 잔금만 남았고요. 이걸 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을까요. 리코에게서요."
조심스럽게 라선이 물었다.
-주택 담보 대출받으실 거죠. 그럼 제가 후순위 채권이 되는데, 라선 씨가 사망하면 집은 곧바로 은행에 넘어가겠네요.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24억에 낙찰될 시 은행 대출금을 빼고 나면 못해도 18억은 받으실 수 있어요. 5억을 빌려주고, 18억을 받는 거, 괜찮은 투자 아닌가요. 33% 확률로 다시 말해 67%의 확률로 18억을 버시는 거죠."
라선은 말 그대로 운명을 건 베팅을 하고 있었다.
정적이 한 걸음 지나갔다. 수화기 너머에서의 리코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아니, 자신의 간절한 표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동정심이든, 연민이든, 무엇이든 필요했다. 잠시 후 리코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그런 조건으론 어렵겠어요.
하...자신 같아도 이런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하는 마음으로 리코에게 연락했었다. 이제는 명확해졌다.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역시, 그렇죠. 바쁠 텐데,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다른 곳을 알아보죠."
-아니, 대출이 어렵다는 뜻이었어요. 5억, 투자할게요.
"네?"
"라선 씨가 새로 아이템을 발굴해 운영할 회사예요. 금액은 5억, 지분은 60%."
"아이템이요? 그런 거 없어요. 창업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투자는 아이템이 아니라 사람 믿고 하는 거예요. 게다가 지분 60%이면, 거의 날강도죠.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약점으로 잡고 제시한 비율이에요. 물론 그만큼 저도 위험 감수를 한다는 뜻이죠. 자선을 베푸는 게 아니니까. 사업가였고, 투자자인 제가 손해 볼 장사를 할 리 없지 않을까요.
리코는 자신만만한 어투로 얘기했다.
-생각할 시간 필요하시죠?
아니, 이제 그럴 시간은 없었다. 어떤 부당한 계약이든, 무리한 조건이든,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뇨. 무조건 할게요."
-믿을 만하네요. 변호사 부탁해서 곧바로 계약서 보내드릴게요. 우선 병원 가서 치료 일자부터 바로 잡으세요. 제 투자가 성공하려면 라선이 나아야 하니까. 이건 주주로서 요구하는 거예요.
"네, 리코, 고마워요."
어깨가 떨렸다.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하지 마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전 이기적이고, 이익만 쫓아요. 제게 도움이 되니까 하는 거예요. 그런 얘기하면 죄책감 들어요.
예의 쾌활한 목소리로 리코가 말했다.
"의도가 어떻든, 제겐 감사한 일이니, 감사하다고 할래요. 저야말로 이렇게 표현하지 않으면 죄책감 들어요."
지금 리코와 대면하고 있었다면,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을 것이다. 눈물이 흘렀고, 흐르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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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정리해 두는 걸 권장드립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라선은 의사의 말을 곱씹었다.
쌓고 밟고 올라서서 꽉 움켜잡았다. 이번 생에 달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NK 계열사 대표라는 직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원래 목표했던 자리도 아니었고, 욕심도 없었다. 그런데도 미련이 갈고리처럼 발목에 박혔다. 인간의 아집이란 우스우리만치 강했다. 라선은 가위를 들고 명함을 한 장, 한 장 잘라나갔다. 500장을 인쇄했고, 그중에 200장도 채 쓰지 못했다. 누구는 죽고 이름을 남긴다지만, 라선은 이름만 남기고 싶지 않았다. 사라진다면, 차라리 어느 것도 없는 것이 깔끔했다. 조금이라도 추하지 않은 모습에서 그만두자.
밖으로 나가 라선은,
고론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