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47화

by 설다람

"주삿바늘 들어갑니다. 조금 따끔할 수 있어요."

간호사는 바늘을 삽입한 후 주사를 제거하고 줄을 연결했다. 천천히 약물이 혈관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저릿한 기운이 느리게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입안에서 금속맛이 났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곤란하시면 바로 버튼 눌러서 알려주세요. 이상 반응 없으면 이따 속도를 좀 올릴게요."

"얼마 정도 걸리나요."

"늦어도 6시간 내에는 끝날 거예요."

상냥하게 간호사가 알려주었다.

몸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고유한 맥박에, 다른 파형의 리듬이 섞여 들어오자, 머리가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처럼 생각의 잔상이 명료해졌다가 풀렸다. 조금 열이 올라왔지만, 땀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투약 전에 안내받았던 일반적인 초기 반응이었다. 멍멍함에 취해 라선은 가수면 상태에 빠졌다. 백지 같은 거리감 없는 공간 속에 있었고 손에 검은 펜이 쥐어져 있었다.

라선은 허공에 펜으로 크게 NK를 적었다.

인수 합병 후 플랫폼 확장을 위해서는 리브랜딩은 필수불가결하다.

잡아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 포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의 균형점을 맞춰야 한다.

NK가 넥스노트를 인수한 목적 중 하나는 NK의 무거운,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NK다우면서도 NK 답지 않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임장고고의 충성 고객이 요구하는 필수 요소는 모두 살려야 한다.

확실한 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변화에 스토리를 담아내야 한다. 지금 당장은 반발을 사더라도, 결국은 받아들이게 되는,

두꺼운 액체 속을 휘젓는 기분으로, 아이디어를 그려 나갔다. 이미지가 파도쳤다가 잠잠해졌고, 이슬비가 내리다가 폭풍우가 몰아쳤다. 어느 순간부터 손에 든 건 펜이 아니라 전동 드릴이었다. 머릿속의 서랍을 모두 열어 받침대로 쓸 만한 것을 찾았지만 인형솜이 전부였다. 사다리를 타고 구름의 꼬리를 잡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NK 페이에셋으로 하자고?"

고론이 안경을 고치며 말했다.

"네?"

라선은 유리 칠판에 비친, 검은 펜을 들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네. 어떻게 생각해요?"

"NK고고 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네."

세안나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럼 이제 필요한 건, ,,,"

"스토리랑 로고라며?"

갸우뚱거리며 고론이 말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 맞아요. 둘 다 중요하죠."

라선은 남일처럼 얘기했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이것 역시 조금 전 했던 말이라는 것을. 세안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서사 없는 로고는 아이콘에 불과하니까."

회의는 종료되었고, 누가 말을 더 걸기 전에 라선은 재빨리 뛰쳐나가 자신의 사무실 방으로 들어갔다.

현기증이 일었고, 쓰러지듯 책상에 엎어졌다. 1차 투여한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정신을 잃은 것인지, 순간 깜빡한 것인지, 완전히 기억을 놓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모니터가 켜져 있었다. 자리를 뜰 때면 언제나 잠금 화면으로 돌려놓았던 자신이었다. 그 자신이 잠시 없었다.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키보드 옆에 넥스테이트에서 나오던 날 토월이 선물로 줬던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구름을 타고 오르는 백룡. 백룡은 눈을 감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 고론."

"맞아요. 그때 쓰러지고 나서 더 상태가 나빠진 것 같아요. 프레시."

"아니, 그거 말고. 이번 인수합병에서도 고론이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거. 그리고 자진퇴사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자리에 있다는 거."

"그야, 계약서에 전원 고용 승계한다고 썼으니까요."

"계약이라 그렇게 해도, 사람 자르는 데는 다 술수가 있는 법이지."

"라선이 확실히 해뒀겠죠. 아무튼 라선이가 무리하고 있는 건 분명해요."

"하긴 한 회사 대표 자리가 그리 만만한 건 아니지. 일개 사원 출신이 사장 노릇하기 쉽겠어?"

고론이 프레시를 쏘아보았다.

"돈 갑절은 더 받는데, 그 정도 무게는 감당해야지."

프레시가 펜을 돌렸다.

고론은 라선을 짓누르고 있는 게, 돈의 무게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음 주에 NK 사장단 회의가 있고, 라선이 발표자로 나갈 예정이었다. 원래 계획 대로라면 지금쯤 리브랜딩 계획이 어느 정도 구체화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 겨우 이름이 정해졌다.

"그래서 리브랜딩 작업 잘 되어 가고 있는 거지?"

"아무렴요!"

주먹을 쥐어 내밀며, 고론이 말했다.

할 수 있다. 그래 왔던 라선이니까.

'네이밍'이라는 쐐기를 박고 나자, 다음 날부터 조금씩 틈이 벌리기 시작했다. 새어나가는 집중력을 모으기 위해 라선은 머리를 잡아 묶었다. 그때 한 움큼 머리카락이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를 손으로 빗자, 검은 선들이 흩날렸다. 바닥에 쪼그려 머리카락을 쓸어 모아 쓰레기통에 넣었다. 동요하지 말자. 아직 티는 안 나잖아. 끈을 다시 풀어 머리를 내렸다. 시간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브랜드 정체성을 기반으로 서사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서사를 바탕으로 로고 작업에 들어갔다.

고론이 보낸 시안을 검토하고, 의견을 주었다. 빠르게 수정본이 도착했다. NK 브랜드 컬러는 파랑이었다. NK로 물려받을 수 있는 디자인 유산을 완전히 파괴하느냐에 대해 여러 의견이 오갔다. 최종적으로 라선은 임장고고의 메인 컬러인 보라색과 NK의 파란색을 그라데이션으로 합친 색을 키 컬러로 선택했다. 다음은 로고였는데, 꽂히는 게 없었다. 모두 납작한 평면에 지나지 않았다. 비틀어야 한다. '혁신' 그 자체가 상징이 되어야 한다. 틀에 박힌 벽에서 튀어나오는...라선은 키 컬러로 꽉 채운 페이지 하나를 출력했다. 그리고 가운데에 칼로 사각형은 반쯤 긋고 나서 뒷면을 손으로 눌렀다.

반으로 자른 부분이 튀어나왔다. 라선은 종이를 구부렸다 펼쳤다가를 반복하며 형체를 바꿔 보았다. NK하면 사각형이다. 이 사각형을 물리적으로 비틀어 보는 건 어떨까. 사각형을 잡고 돌리니, 모래시계 형태가 되었다. 이것보다 조금 더 역동적이어야 한다. 곧바로 라선은 고론에게 아이디어를 사진과 함께 전달했다.

[3D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 물성이 느껴지도록.]

[대박! 좋은 것 같아! 시안을 만들어 볼게!]

고론은 느낌표를 창처럼 흔드는 것처럼 답했다.

하루 뒤에 고론은 10가지 3D 로고를 보내줬다. 프루티거 에어로 스타일도 있었고, 미니멀한 것도 있었다. 그중에서 눈을 사로 잡는 것은 사선으로 기울어진 채 반쯤 꼬인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라데이션이 마치 무한히 확장될 듯한, 회오리 바람의 선처럼 보였다. NK 페이에셋은 본질은 기술을 통해 금융의 영역 자체를 넓히는 것이다. 개인의 모든 금융 사이클이 끝없이 회전하는.

[3안을 발전시켜보죠.]

평소 같았으면, 아예 디자인팀으로 가 토론했을 테다. 그러나 지금은 아픈 기색이 은연중에, 언제라도 드러날 수 있었기에 직접 대면하는 것은 피해야 했다. 지금의 태도 자체가 이미 평상시와 다르다는 신호를 주는 것과 다름 없었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응! 그럼 이걸로 더 변화를 줘 볼게!]

현재 리브랜딩을 이끌고 있는 게, 티 없는 신뢰를 주는 고론이라 다행이었다.

2차 수정을 거친 뒤, 스토리에 딱 맞는 로고가 나왔다.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아래로 보이는 블루팩토리의 상징인 1층 로비를 바라보았다. 도서관으로 꾸민 로비에서 시민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생경했다. NK에서 일하고 있다.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는 건, 더더욱 낯설었다. 유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6층을 눌렀다.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했다.

"오랜만이네요 라선 씨."

"반갑습니다. 이 부사장님."

라선은 직함으로 심찬을 불렀다.

"큰 그림 그리고 계신지 모르고, 제가 이전에 실례했네요. NK 부동산 같은 곳에 전무는 너무 그릇이 작았죠."

"마침 기회가 왔고, 운이 좋아 이 자리를 맡았습니다."

"겸손하기도 하셔라. 그 운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심찬이 비꼬았다.

라선은 상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사장단 회의에 아버지 대신 본인이 참석할 모양이었다. 회장은 동생에 대한 신의는 저버렸어도, 조카는 버리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넥스노트를 인수한 이상, NK 부동산은 사라져야 한다. 그건 정해진 수순이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 꼭 그렇게 만들 것이고. 이번 회의에서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금융앱의 지형을 바꿀 78번째 수, 그것이 NK 페이에셋이 얻을 타이틀이었다.

6층에 도착하자 직원이 대회의실로 안내했다. 각 계열사 사장들이 차례로 들어왔고, 라선은 맑은 미소로 인사했다. 사장들은 그리 반기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번 인수합병이 회장이 밀어붙인 결과라는 것을 알려주는 징표였다. 마지막으로 회장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사장은 일제히 일어나 회장을 맞았다.

"다들 잘 지냈죠. 오늘 모임에선 가볍게 새 식구 얼굴도 보고, 신규 사업 이야기도 듣고자 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여기는 유라선 사장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롭게 NK에 합류하게 된 유라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준비되셨으면 짧게 신규 사업을 소개해주시죠."

회장이 라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에 금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조금만 버텨라. 일어서 앞으로 나갔다. 화면을 켰고, 준비해 온 발표 자료를 띄웠다.

화면 한가운데 로고와 함께 슬로건이 떴다.

NK 페이에셋

-미래를 넓히는 금융, 기술로 더하는 자산-

"반갑습니다. 지금부터 NK 페이에셋을 소개하겠습니다. NK 페이에셋의 목적은 사람들의 금융 패턴을 통해 초개인화된 자산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용자가 소비하는 것들, 살펴보는 대출 상품, 가입한 계좌별사용 빈도, 심지어는 주행 기록까지, 이 모든 게 하나로 모입니다. 이미 임장고고에서 위치기반 금융 패턴을 데이터화하고 개인의 기록을 분석해 맞춤형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주요 수입원이 광고 수익 역시 이러한 초개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 예리한 타기팅 광고가 가능한 것이죠,

여기에 일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금융 행위인 '결제'를 추가해, 하나의 앱 안에서 금융 활동의 전주기(全週期)가 이루어지도록 하고자 합니다. 다양한 기능에도 끊기지 않는 UX로 극강의 만족감을 선사할 것입니다. NK 페이에셋은 금융 경험의 새로운 표준입니다."

흔들림 없는, 꽉 찬 목소리로 문장을 끝맺었다. 등에서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윽고 성긴 박수 소리가 들렸다. 뒤틀린 표정의 이심찬은 박수조차 치지 않았다. 회의는 회사 전체 비전 체계 방향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라선은 송곳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참느라, 집중할 수 없었다. 손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을 때, 다행히 회의가 종료되었다. 회장이 일어났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회의실을 나갔다. 라선은 회장 옆을 나란히 걸었다. 복도를 돌아서 헤어지기 전, 회장이 라선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탈피의 순간에 가장 약해지는 법이지, 긴장해서 잘 준비해 봐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허리를 반으로 굽혀 라선이 인사하려 하자, 회장이 말렸다.

"NK도 바뀌어야죠. 그러려고 모신 분인데. 유연하게 해요."

라선은 가볍게 목례했다. 회장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반대편으로 향했다. 시야에서 회장이 사라지고 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을 때,

누가 어깨를 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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