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45화

by 설다람

"웨일, DA 인베스트먼트와 미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라선이 웨일의 방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NK에서 IM을 보내달래요. 인수를 검토해 보겠대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NK는 실무단에서 거절당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실무자는 거절했지만, 회장이 추가로 요청했어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라선이 말했다.

"그러니까 화요일에 조선호텔 스카이 라운지에 가다 우연히 엘리베이터를 NK 회장과 같이 타게 되었어요. 기회 다 싶어 저희 회사 소개를 짧게 드렸죠. 그리고 오늘 답이 왔고요."

믿기 어려웠다.

"그게 말처럼 쉽게 될 일이 아닌데, 또 헛물켜는 거 아닌가요."

웨일이 의심하자, 라선은 회장이 직접 보낸 메일을 보여줬다. 진짜였다. 요청 사항은 IM을 오늘 중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왔다. 고민이 이슬처럼 맺히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풀잎에 매달린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것처럼, 라선이 물었다.

웨일이 고민을 접었다.

"줘야죠. DA 인베스트먼트으로 준비한 최종본을 보내죠."

"그걸론 부족해요. NK에 최적화된 IM이 필요해요."

"그건 당연하지만, 지금 없잖아요. 회장은 오늘 중으로 달라고 했고."

"그래서 제가 만들어 뒀어요! 검토해 주시면, 피드백 반영해서 바로 수정할게요."

수상할 정도로 치밀했다. 누구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것도 자격지심이겠지. 웨일은 까지려던 열등감을 다시 손으로 꾹꾹 눌러 붙였다.

결과만 생각하자. 웨일은 웨일답게, 집중의 끈을 바로 묶었다.

"철저해서 좋네요. 보내줘요."

"네! 지금 당장 드릴게요!"

달뜬 목소리로 답하고 라선은 뒤돌았다. 라선이 뛰어서 제자리로 가려는 찰나 웨일이 외쳤다.

"참 NDA부터 체결하자고 답신해야 하니, 받은 메일도 같이 전달해 줘요."

"역시, 웨일! 잊을 뻔했어요."

라선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신입사원 같은 생기가 진동했다.

IM을 검토한 NK에서 인수의향서를 들고 찾아왔다. 조건에 불합리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라선은 한 줄을 유심히 보았다.

현재 처우의 하향 없는, 완전한 고용 승계를 보장하는 조항이었다. 실사 이후 최종 인수가 확정되기 전 NK 회장은 라선을 불렀다.

"한비가 얘기해 줬죠? 화요일이면 조선호텔에 간다고."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회장이 말했다.

"아, 그게..."

"직원 명단에 이름을 보고 바로 전활 걸었죠. 전 한비가 여기 다니는 지도 몰랐어요. 엄한 데서 뒹굴거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제 몫은 하나 봐요."

"하는 정도가 아니죠. 임장고고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어 낸 주인공인걸요. 언니가 만든 캐릭터 자체도 인기가 좋아 굿즈 제작 요청이 쇄도하고 있어요."

"이벤트로 시장성을 테스트해 봐도 재밌겠군요. 요즘 굿즈에 죽고 사는 사람들 많던데."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죠. 실제로 몇 번 건의가 나오긴 했습니다. 다른 사안들이 우선이라, 밀렸었죠."

"그 부분이 걱정이었어요. 지금 임장고고의 브랜드 정체성이 강한데, 이걸 어떻게 NK와 연결시킬 수 있을까. 따로 분리된 채로 이끌고 가야 하나."

"현재 임장고고 브랜드 정체성을 그대로 이식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하면 사장이 바뀐 뒤로 맛이 변한 맛집처럼 오히려 더 떨어질 수 있죠. 그래서 임장고고의 브랜드 정체성을 NK 브랜드의 한 요소로 삽입해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장에 NK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힙함을 되살리는 비주얼이 되는 거죠."

"그러려면 임장고고도 스스로를 어느 정도는 벗겨내야겠네요."

"네, 유저를 잡고 있는 핵심은 유지한 채 새로운 감각을 주면서, NK의 자본력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시도를 해나가는 거죠.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봅니다."

"무한한 가능성만큼 막연한 건 없죠."

"그래서 좋은 직원들이 필요합니다. 현재 넥스노트 임직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모자란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신선한 시도'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우리 직원들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한비 언니도 그중 한 명이고요. 어느 한 사람도 누락 없이 남아야 할 사람들이죠."

라선이 목소리에 힘주었다.

"회장님. 처우에 하향 없는 고용 승계 보장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것 때문에 DA 인베스트먼트를 피하고, 저를 찾아왔던 거죠. 확인해 보니, 먼저 실무진에서 거절했던데, 그걸 다시 끌어올린 거예요?"

"네. NK는 사업 이전에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넥스노트 사람들이 회장님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건 말이 아니라, 실적으로 증명될 거고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회장이 미소 지었다.

회장은 약속을 지켰다.

'1,800,000,000'

라선은 계좌 입출금 내역을 봤다.

이걸로 뭐 하게 옆에서 민하가 물었다.

"내 집 마련해야죠."

"좋은 생각이네요. 생각해 둔 곳은 있어요?"

반은 고양이, 반은 사람인 타아와가 말했다.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거기 곧 집값 떨어진대."

"입지 상 절대 18억 이하로 떨어질 일은 없어요."

"아무렴 떨어질 일 없을 것 같은데요."

"봐요. 타아와 씨도 동의하잖아요."

"이 집 보증금은 뒤에 세입자가 와야 빼줄 수 있어요. 현금이 없어서..."

타아와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게 어딨어요! 당장 내놔요."

"얘 또 사업하다 망했어."

"아니, 티끌 끌어모아 겨우 산단 말이에요!"

라선이 타아와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영끌하다, 진짜 영혼 그대로 끌려가는 수가 있어."

민하가 타아와에게서 라선의 손을 떼어냈다. 타아와는 고양이로 변해 라선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보증금은 걱정 마, 심장을 담보로 내놓아서라도 구해올 거니까. 맞지?"

타아와는 귀를 접었다 열었다.

토요일 오후 라선은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104동 3-4라인 앞에서, 중개사를 기다렸다. 정원수 가지가 바람에 따라 천천히 노를 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자리에서도 순항 중이었다. 라선은 일이 제법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송호 대교에서 몸을 던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끝없이 낙하하는 기분. 자신의 삶을 압축시켜 놓은 듯한 공포였다. 자신이 살아온 날의 총합은 0이라고, 줄곧 생각해 왔다. 비교적 최근까지, 정확히는 계좌에 10자리 숫자가 찍히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마땅한 곳에 마땅한 삶을 등기 치는 것이었다. 목숨을 구한 그 이후로, 오로지 이것을 위해 살아왔던 것을 아닐까. 생에는 크고 작은 기쁨과 작고 큰 슬픔이 있다. 내 집을 마련한다는 건, 그 둘은 품을 수 있는 여유를 얻는 것이다. 돈이 없어도 그런 여유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드물고, 위대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력이 없으면 강퍅해지고, 야박해진다. 좁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의 생을 한 번 삶을 한 번 살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의 생을 여러 번 나눠 산다.

첫 번째 생은 다리 위에서 죽었다.

이번이 두 번째 생이니까,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떨어지는 게 아니라, 다리를 건널 차례였다.

느린 생각을 되감고 있을 때, 중개사가 나타났고 라선은 따라서 매물을 보러 갔다. 15층 로열층이었고, 볕이 잘 들어 불이 켜지 않아도 환했다. 이미 검증된 신축이기에 누수 흔적 외에는 따로 살필 부분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라선은 이 집이어야만 했다. 입지는 몇 번이나 분석했고, 임장은 매주 나왔다. 살지 않아도, 정든 동네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때가 맞아 적정 가격에 나온 집이었다. 인기가 한창이라, 나오는 족족 빠르게 매매가 이루어지는 아파트였다. 고민은 기회를 놓치게 할 뿐이었다.

집을 보고 나오는 길에 중개사에게 가계약금을 넣고 싶다고 했다. 집주인에게 중개사가 전화를 걸었고, 계좌를 받았다. 라선은 중개 사무실로 가 등기부등본 상 소유주와 가계약금을 받을 통장의 예금주명이 일치하는지 확인했다.

중개사는 집주인과 라선에게 가계약 사항을 문자로 보내주었다.

[부동산 가계약서]

- 부동산의 표시 :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111동 1504호

- 매매예정금액 : 24억 원

- 가계약금 : 2천4백만 원

- 본계약체결일 : 2025. 2. 28.

- 매도인 인적사항 : 지태야, 970222-******

- 매수인 인적사항 : 유라선

- 매도인 계좌번호 : 조흥은행 102-822-38489

8 거래약정내용 :

가.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매도인은 가계약금의 배액을 상환하고, 매수인은 가계약금을 포기하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고, 계약체결 후 매도인, 매수인 어느 한쪽이 계약불이행하는 경우는 가계약금을 위약금으로 본다.

나. 가계약의 효력은 가계약 체결일로부터 본계약이 체결될 때까지 유효하다.

다. 본 가계약은 매도인/매수인에게 위 부과조건이 기록된 본 가계약내용의 문자를 핸드폰으로 발신하여 동의를 받고, 가계약금은 온라인 송금한다.

계약 내용을 살펴보고 나서, 라선은 가계약금을 집주인에게 송금했다.

활이 시위를 떠났다. 이제 진짜 간다.

계약일을 3일 뒤 저녁 7시로 잡고, 중개사와 헤어졌다. 머리가 어질 거렸다.

"좋은 아침이요!"

라선은 힘차게 인사하며 출근했다. 딱 정시였다. 괜히 일찍 나와서 눈총 받는 상사는 되고 싶지 않았다. 라선은 효율을 통해서 여유를 만들고, 여유에 기대어 나오는 도전 의식으로 돌아가는 회사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었다. 사무실을 블루팩토리로 이전하고 나서, 사람들 사이에서 들뜬 기운이 돌았다. 다 쓰러져 가던 퀵펜슬에 남아 버틴 사람들은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퀵펜슬에서 버려졌던 라선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나치게 밝은 거 아니에요?"

세안나가 말했다.

"원래 이 정도 텐션이었어요."

"퍽하면 아프다고 하면서, 텐션 풀고 쉬엄쉬엄 해요."

"쉬엄쉬엄하고 있어요."

"그럼 다행이고,"

먼저 손을 씻고 세안나가 나갔다. 라선은 손을 씻으면서 거울을 봤다. 핏기가 없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젠 웨일도 없고 허니맨도 없었다. 아직 새로운 자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미미한 균열을 세안나는 알아챈 것 같았다.

지금 회사는 어느 정도 수준으로 리브랜딩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NK 회장 앞에선 자신 있게 말했지만, 언제나 확실한 것은 없었다. 확실한 건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릴 적기였다. 고론이 리브랜딩 TF를 꾸려, 치열하게 비주얼을 발굴했다. 앱 명칭을 바꾸는 방향도 열어두었다.

"라선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요. 괜찮아요."

그런데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웨일 DA 인베스트먼트와 미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라선이 웨일의 방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NK에서 IM을 보내달래요. 인수를 검토해 보겠대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NK는 실무단에서 거절당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실무자는 거절했지만, 회장이 추가로 요청했어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라선이 말했다.

"그러니까 화요일에 조선호텔 스카이 라운지에 가다 우연히 엘리베이터를 NK 회장과 같이 타게 되었어요. 기회 다 싶어 저희 회사 소개를 짧게 드렸죠. 그리고 오늘 답이 왔고요."

믿기 어려웠다.

"그게 말처럼 쉽게 될 일이 아닌데, 또 헛물켜는 거 아닌가요."

웨일이 의심하자, 라선은 회장이 직접 보낸 메일을 보여줬다. 진짜였다. 요청 사항은 IM을 오늘 중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왔다. 고민이 이슬처럼 맺히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풀잎에 매달린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것처럼, 라선이 물었다.

웨일이 고민을 접었다.

"줘야죠. DA 인베스트먼트으로 준비한 최종본을 보내죠."

"그걸론 부족해요. NK에 최적화된 IM이 필요해요."

"그건 당연하지만, 지금 없잖아요. 회장은 오늘 중으로 달라고 했고."

"그래서 제가 만들어 뒀어요! 검토해 주시면, 피드백 반영해서 바로 수정할게요."

수상할 정도로 치밀했다. 누구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것도 자격지심이겠지. 웨일은 까지려던 열등감을 다시 손으로 꾹꾹 눌러 붙였다.

결과만 생각하자. 웨일은 웨일답게, 집중의 끈을 바로 묶었다.

"철저해서 좋네요. 보내줘요."

"네! 지금 당장 드릴게요!"

달뜬 목소리로 답하고 라선은 뒤돌았다. 라선이 뛰어서 제자리로 가려는 찰나 웨일이 외쳤다.

"참 NDA부터 체결하자고 답신해야 하니, 받은 메일도 같이 전달해 줘요."

"역시, 웨일! 잊을 뻔했어요."

라선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신입사원 같은 생기가 진동했다.

IM을 검토한 NK에서 인수의향서를 들고 찾아왔다. 조건에 불합리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라선은 한 줄을 유심히 보았다.

현재 처우의 하향 없는, 완전한 고용 승계를 보장하는 조항이었다. 실사 이후 최종 인수가 확정되기 전 NK 회장은 라선을 불렀다.

"한비가 얘기해 줬죠? 화요일이면 조선호텔에 간다고."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회장이 말했다.

"아, 그게..."

"직원 명단에 이름을 보고 바로 전활 걸었죠. 전 한비가 여기 다니는 지도 몰랐어요. 엄한 데서 뒹굴거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제 몫은 하나 봐요."

"하는 정도가 아니죠. 임장고고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어 낸 주인공인걸요. 언니가 만든 캐릭터 자체도 인기가 좋아 굿즈 제작 요청이 쇄도하고 있어요."

"이벤트로 시장성을 테스트해 봐도 재밌겠군요. 요즘 굿즈에 죽고 사는 사람들 많던데."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죠. 실제로 몇 번 건의가 나오긴 했습니다. 다른 사안들이 우선이라, 밀렸었죠."

"그 부분이 걱정이었어요. 지금 임장고고의 브랜드 정체성이 강한데, 이걸 어떻게 NK와 연결시킬 수 있을까. 따로 분리된 채로 이끌고 가야 하나."

"현재 임장고고 브랜드 정체성을 그대로 이식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하면 사장이 바뀐 뒤로 맛이 변한 맛집처럼 오히려 더 떨어질 수 있죠. 그래서 임장고고의 브랜드 정체성을 NK 브랜드의 한 요소로 삽입해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장에 NK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힙함을 되살리는 비주얼이 되는 거죠."

"그러려면 임장고고도 스스로를 어느 정도는 벗겨내야겠네요."

"네, 유저를 잡고 있는 핵심은 유지한 채 새로운 감각을 주면서, NK의 자본력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시도를 해나가는 거죠.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봅니다."

"무한한 가능성만큼 막연한 건 없죠."

"그래서 좋은 직원들이 필요합니다. 현재 넥스노트 임직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모자란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신선한 시도'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우리 직원들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한비 언니도 그중 한 명이고요. 어느 한 사람도 누락 없이 남아야 할 사람들이죠."

라선이 목소리에 힘주었다.

"회장님. 처우에 하향 없는 고용 승계 보장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것 때문에 DA 인베스트먼트를 피하고, 저를 찾아왔던 거죠. 확인해 보니, 먼저 실무진에서 거절했던데, 그걸 다시 끌어올린 거예요?"

"네. NK는 사업 이전에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넥스노트 사람들이 회장님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건 말이 아니라, 실적으로 증명될 거고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회장이 미소 지었다.

회장은 약속을 지켰다.

'1,800,000,000'

라선은 계좌 입출금 내역을 봤다.

이걸로 뭐 하게 옆에서 민하가 물었다.

"내 집 마련해야죠."

"좋은 생각이네요. 생각해 둔 곳은 있어요?"

반은 고양이, 반은 사람인 타아와가 말했다.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거기 곧 집값 떨어진대."

"입지 상 절대 18억 이하로 떨어질 일은 없어요."

"아무렴 떨어질 일 없을 것 같은데요."

"봐요. 타아와 씨도 동의하잖아요."

"이 집 보증금은 뒤에 세입자가 와야 빼줄 수 있어요. 현금이 없어서..."

타아와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게 어딨어요! 당장 내놔요."

"얘 또 사업하다 망했어."

"아니, 티끌 끌어모아 겨우 산단 말이에요!"

라선이 타아와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영끌하다, 진짜 영혼 그대로 끌려가는 수가 있어."

민하가 타아와에게서 라선의 손을 떼어냈다. 타아와는 고양이로 변해 라선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보증금은 걱정 마, 심장을 담보로 내놓아서라도 구해올 거니까. 맞지?"

타아와는 귀를 접었다 열었다.

토요일 오후 라선은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104동 3-4라인 앞에서, 중개사를 기다렸다. 정원수 가지가 바람에 따라 천천히 노를 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자리에서도 순항 중이었다. 라선은 일이 제법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송호 대교에서 몸을 던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끝없이 낙하하는 기분. 자신의 삶을 압축시켜 놓은 듯한 공포였다. 자신이 살아온 날의 총합은 0이라고, 줄곧 생각해 왔다. 비교적 최근까지, 정확히는 계좌에 10자리 숫자가 찍히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마땅한 곳에 마땅한 삶을 등기 치는 것이었다. 목숨을 구한 그 이후로, 오로지 이것을 위해 살아왔던 것을 아닐까. 생에는 크고 작은 기쁨과 작고 큰 슬픔이 있다. 내 집을 마련한다는 건, 그 둘은 품을 수 있는 여유를 얻는 것이다. 돈이 없어도 그런 여유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드물고, 위대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력이 없으면 강퍅해지고, 야박해진다. 좁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의 생을 한 번 삶을 한 번 살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의 생을 여러 번 나눠 산다.

첫 번째 생은 다리 위에서 죽었다.

이번이 두 번째 생이니까,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떨어지는 게 아니라, 다리를 건널 차례였다.

느린 생각을 되감고 있을 때, 중개사가 나타났고 라선은 따라서 매물을 보러 갔다. 15층 로열층이었고, 볕이 잘 들어 불이 켜지 않아도 환했다. 이미 검증된 신축이기에 누수 흔적 외에는 따로 살필 부분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라선은 이 집이어야만 했다. 입지는 몇 번이나 분석했고, 임장은 매주 나왔다. 살지 않아도, 정든 동네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때가 맞아 적정 가격에 나온 집이었다. 인기가 한창이라, 나오는 족족 빠르게 매매가 이루어지는 아파트였다. 고민은 기회를 놓치게 할 뿐이었다.

집을 보고 나오는 길에 중개사에게 가계약금을 넣고 싶다고 했다. 집주인에게 중개사가 전화를 걸었고, 계좌를 받았다. 라선은 중개 사무실로 가 등기부등본 상 소유주와 가계약금을 받을 통장의 예금주명이 일치하는지 확인했다.

중개사는 집주인과 라선에게 가계약 사항을 문자로 보내주었다.

[부동산 가계약서]

- 부동산의 표시 :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111동 1504호

- 매매예정금액 : 24억 원

- 가계약금 : 2천4백만 원

- 본계약체결일 : 2025. 2. 28.

- 매도인 인적사항 : 지태야, 970222-******

- 매수인 인적사항 : 유라선

- 매도인 계좌번호 : 조흥은행 102-822-38489

8 거래약정내용 :

가.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매도인은 가계약금의 배액을 상환하고, 매수인은 가계약금을 포기하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고, 계약체결 후 매도인, 매수인 어느 한쪽이 계약불이행하는 경우는 가계약금을 위약금으로 본다.

나. 가계약의 효력은 가계약 체결일로부터 본계약이 체결될 때까지 유효하다.

다. 본 가계약은 매도인/매수인에게 위 부과조건이 기록된 본 가계약내용의 문자를 핸드폰으로 발신하여 동의를 받고, 가계약금은 온라인 송금한다.

계약 내용을 살펴보고 나서, 라선은 가계약금을 집주인에게 송금했다.

활이 시위를 떠났다. 이제 진짜 간다.

계약일을 3일 뒤 저녁 7시로 잡고, 중개사와 헤어졌다. 머리가 어질 거렸다.

"좋은 아침이요!"

라선은 힘차게 인사하며 출근했다. 딱 정시였다. 괜히 일찍 나와서 눈총 받는 상사는 되고 싶지 않았다. 라선은 효율을 통해서 여유를 만들고, 여유에 기대어 나오는 도전 의식으로 돌아가는 회사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었다. 사무실을 블루팩토리로 이전하고 나서, 사람들 사이에서 들뜬 기운이 돌았다. 다 쓰러져 가던 퀵펜슬에 남아 버틴 사람들은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퀵펜슬에서 버려졌던 라선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나치게 밝은 거 아니에요?"

세안나가 말했다.

"원래 이 정도 텐션이었어요."

"퍽하면 아프다고 하면서, 텐션 풀고 쉬엄쉬엄 해요."

"쉬엄쉬엄하고 있어요."

"그럼 다행이고,"

먼저 손을 씻고 세안나가 나갔다. 라선은 손을 씻으면서 거울을 봤다. 핏기가 없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젠 웨일도 없고 허니맨도 없었다. 아직 새로운 자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미미한 균열을 세안나는 알아챈 것 같았다.

지금 회사는 어느 정도 수준으로 리브랜딩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NK 회장 앞에선 자신 있게 말했지만, 언제나 확실한 것은 없었다. 확실한 건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릴 적기였다. 고론이 리브랜딩 TF를 꾸려, 치열하게 비주얼을 발굴했다. 앱 명칭을 바꾸는 방향도 열어두었다.

"라선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요. 괜찮아요."

그런데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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